생생후기

나폴리,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2주

작성자 강지원
이탈리아 CPI 18 · ENVI 2012. 10 -

ERCOLANO: STREETS AND GARDENS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영하 13도의 지금 여기, 서울. 가만히 눈을 감고 나폴리를 회상한다. 그 기억은 결코 잔잔하게 흐르지 않는다. 신호등 없이 내 몸을 스치듯 지나던 날쌘 자동차들과 온몸으로 소통하던 나폴리탄, 시끄럽게, 하지만 가장 다정하게 울려 퍼지던 소리, 그 냄새, 그 사람들과 단 한 명의 작고 어린 동양 여자, 나. 작렬하던 나폴리의 뜨거운 태양 아래 내 인생 가장 ‘핫 한’ 2주가 결국 시작되었다.

유럽 여행을 위해 휴학을 결심하고 방학부터 열심히 일했다. 가족의 지원으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쥐게 된 나는 7개국을 돌고 오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매일매일 여행 계획만 짜댔다. 그러다 2주 전, 나폴리 워크캠프를 발견했고 그 계획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워크캠프 비용과 네덜란드에서 나폴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새로 마련해야 했고, 미리 사두었던 독일로 가는 비행기표, 독일에서 다시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표를 날리게 생겼으니 월급이 홀딱 날아가는 꼴이 된 거다. 게다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리 비싼 비행기표를 산 건지.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꼭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한 다섯 시간을 꼬박 골몰하다 결국 가기로 했다. 이 모든 게 준비성 철저한 내 탓이려니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새로운 비행기표를 샀다. 여행국가는 7개국에서 4개국으로 다이어트 시켰고, 쓸 수 있는 돈도 상당히 많이 줄었다. 하지만 일단 나폴리에 가면, 누군지 알 수 없는 그들을 만나면, 그리고 2주를 정말 끝내주게 지낸다면 이 모든 건 하나도 아깝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들떠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꿈 같은 일주일을 보낸 후 나폴리로 날아갔다. ‘좀도둑이 많다더라, 집시가 다 훔쳐간다더라, 거지들이 더 많다더라, 영어도 못한다더라’ 등등 오만 가지 경고라는 경고는 다 들은 나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캐리어와 배낭, 그리고 내 몸을 일체 시키고 어찌됐든 약속 장소로 ‘살아서’ 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국민의 97퍼센트가 영어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 있다 오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대체로 영어를 못하기도 했지만, 영어를 하는 사람조차도 그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 힘들었다. 게다가 겁이 많은 나는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을 보면 흠칫하고 놀라는 경향이 있는데, 나폴리 역은 마치 아프리카 같았다. 날씨는 왜이리 더운지, 영하를 웃돌던 네덜란드에서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 온 나로썬 25도의 나폴리가 너무나도 벅찼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초 긴장상태에 짐은 무겁고, 긴장하니 사람들은 나를 더 쳐다보고, 나는 더 긴장하며 캐리어를 앞당기는, 그 몇 시간이 지금도 눈앞에 아찔하게 펼쳐진다.

역 도착. 살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짐도 그대로, 나도 그대로. 캠프 리더와 몇몇의 친구들이 마치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옷가지를 벗어두고 땀을 식히며 정신을 차려보니 그제서야 정말 나폴리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창 밖으로 널린 낡은 이불과 하릴없이 우리를 쳐다보는 이웃 주민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지는 노을 지는 하늘. 이것이 내가 에르꼴라노, 그 ‘우리 동네’를 기억하는 가장 첫 장면이다.

프랑스, 벨라루시, 세루비아,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멕시코, 대한민국과 이탈리아. 우리는 이렇게 총 8개 국가, 그리고 총 10명이었다. 서로의 이름, 나라, 침대 위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약간은 어색한, 그러나 무엇인지 모를 뭔가가 자꾸 우리를 가까이 당기는 느낌만 가지고 그렇게 첫 날이 지나갔다. 이게 재미있는 건지,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내 앞에 앉은 눈이 파란 너는, 머리가 노란 너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2012년 10월 13일. 그간 지나온 무수한 10월 13일들을 떠올리며, 내가 태어나 처음 와 보는 이곳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보낸 이 하루를 가히 ‘역사적’이라 여기기로 하며 잠에 들었다.

‘교회 수련회 같다’. 이건 내가 유럽에 들고 간 다이어리에 썼던 문구 중 하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 느낌이었다. 첫인상에 대한 롤링 페이퍼를 쓰고 한 명씩 나와서 발표를 하고 전체 박수. 이런 것 까지는 참을 만 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손뼉치기 게임을 하고 두 팔을 벌리고 태양의 기운을 받으며 ‘마릴린 먼로’와 ‘영화 007’을 흉내 내고 심지어 세탁기 흉내까지. 정말 이게 뭔가 싶은 생각에 머리만 복잡했고, 수다쟁이인 내가 말 수까지 줄었다. 한국인은 당연히 없었고 다들 내가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알고 있는 현실도 싫었다. 소비에트 연방 출신의 친구들은 주로 러시아어로 대화하니 낄 틈이 없고, 영어에 자신감을 갖고 왔는데 말이 안 통하니 실력이고 나발이고 이야기가 이어지질 않았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수백 번 했다. 내가 상상했던 그런 워크캠프가 아니라며 고개를 숙이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러기를 삼 일. 멕시코에서 뒤늦게 친구 두 명이 합류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사촌이었다. 둘이 꼭 붙어 다니고 스페인어로 이야기 하는데다 캠프리더도 그들에게 스페인어로 말했다. 프랑스 친구와 슬로바키아 친구는 연애를 시작했다. 완전 외톨이였던 거다. 자기애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내가 외톨이라니. 가족들도 보고 싶고 네덜란드에 돌아가면 나를 공주 취급 해주는 친구들과 친구의 가족들을 떠올리니 먹먹했다. 내일까지 정 안되겠으면 포기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우리가 맡은 일은 ‘청소’였다. 가장 처음 주어진 업무는 바닷가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었는데 나폴리는 거리와 바닷가, 사실대로 말해 그냥 온 주변이 다 더러워서 일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첫 날이었지만 일을 한 6시간 정도 했던 것 같다. 정신 없이 일하면 밥 시간, 또 일하면 밥 시간. 차라리 일을 하니 하루가 빨리 가서 좋다고 느꼈다. 일만 하니 딱히 말을 할 필요도 없고, 피곤해서 입도 잘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캠프리더가 일하는 ‘Forum dei Giovani di Ercolano’라는 기관에서 우리와 함께 일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곳의 사람들이 매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주었다.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고 같이 이야기 나눌 거리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우리와 한 두 살에서 열살 정도까지 차이 나는 젊은이들이었고, 영어는 다소 어눌하지만 자꾸만 말을 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들과 친분을 쌓다 보니 일도 재미있어지고 말문이 트여갔다. 아마 이게 내가 이 워크캠프에서 받은 가장 좋은 기억인 것 같다. 우리 10명을 제외하고 주변에서 우리를 십시일반 도우며 함께 일하는 열 명 남짓의 그들에게서 오랜만에 받아보는 가식 없는 호의, 때묻지 않은 정을 느꼈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점점 시끄러워져 갔고 친구들도 내게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나폴리탄들은 대게 게으르다. 우리는 주로 저녁을 밤 10시에 먹었고, 1시쯤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아침은 7시쯤 기상하니 점심 때가 되면 졸리다. 그럼 또 두 시간을 자도록 허락해준다. ‘씨에스타’라는 낮잠 시간을 나는 정말 사랑했다. 시차적응도 완벽해졌고, 나폴리의 시계에도 적응했다. 저녁을 11시에 먹어도 괜찮았다. 사실 일주일쯤 지나니 모든 게 괜찮았다. 다 괜찮았다. 내가 그들과 소통할 수 있고, 내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나의 나라 한국에 와 보고 싶다는 친구들까지 생겼으니 이제 다 괜찮은 거였다. 나는 관심 받고 싶었던 거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자꾸 혼자라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인이 없다는 것에 절망했던 것이 문제였다. 내가 마음을 열지 않는데 어느 누가 계속 문을 두드리랴. ‘마음을 열어라, 소통해라, 다가가라’는 이런 말들은 상투적이라 생각했다. 다 아는 말이라고 간과했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중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을 때 다른 모든 것들은 부질없어 지는 법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파티가 잦아지고 어울려 노는 시간도 늘어났다. 우리는 자연스레 이름을 부르고 스킨십 했고 서로가 할 말을 끊임없이 했다. 일 할 때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몸은 고되어도 입은 열렸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고, 궁금한 것들도 자꾸 생겨났다. 이러다 보니 이별이 점점 두려워지는 거였다. 한국에서 워크캠프 후기를 찾아본 게 기억났다. 다들 못 헤어져서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더니 그 사태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뭐니뭐니해도 에르꼴라노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들은 언제나 내 별명을 부르며 거리낌없이 장난쳐주었고, 나에게 ‘Small but Dangerous’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며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새벽 2시가 넘도록 파티를 즐겼고, 4시간 후 5명의 친구들이 먼저 떠나면서 이별은 실로 이뤄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는 페이스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직도 사진을 업로드하며 그 날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

눈이 펑펑 오는 영하 10도의 크리스마스다. 러시아 친구들은 우리보다 더 추울 것이고, 멕시코 친구들은 아직도 따뜻할 거다. 우리는 이처럼 세계 곳곳에 퍼뜨려져 몇 십 년을 살아왔고, 고작 2주를 만났다 다시 또 몇 십 년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수 많은 곳에 심어져 있는 단 10명만이 그 2주를 경험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 아닌가. 그리고 그 기적은 오늘도 나를 더 힘차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친구에게 약속했다. 그 친구는 이번이 네 번째 참가였는데, 나 또한 꼭 한 번 더 참가 하겠노라고. 그 약속을 지키려 나는 내년 여름에 또 어딘가로 갈 것이다. 글이 길어졌다. 내가 말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고, 또한 나누고 싶었다. 누군가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는 꼭 참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또한 한마디 더. “마음을 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