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새로운 나를 만난 워크캠프
Parum Rectory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워크캠프에 대해서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처음 알게 되어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 역시 인터넷으로 워크캠프에 대한 긍정적인 후기를 읽었다며 이야기를 들려주어 꼭 참가하고 싶다고 결심했지만 아무래도 비행기 티켓을 개인적으로 구입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정하면서 어학연수 국가인 영국 근처의 유럽 나라로 이 참에 워크캠프도 다녀와야겠다 싶어 어학연수 기간 중에 있는 워크캠프를 골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유럽의 다른 국가로 오갈 때는 저가 항공을 이용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 오가는 것보다 비용이나 시간 모두 훨씬 경제적이며 여행과 봉사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습니다. 또한 후기에서 읽은 대로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경험을 하고,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이 워크캠프에 참가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워크캠프 장소와 가장 가까운 베를린 공항으로 저가항공을 통해 이동한 후 혼자 힘으로 기차 티켓을 구입하고 이동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워크캠프 개최 지역이 외딴 곳에 있다 보니 이동시간도 길고 기차를 갈아타야 해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침낭을 끌어안고 두려움을 견디며 도착했을 때에는 스스로 해냈다는 쾌감과 워크캠프를 시작하는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중 나오신 분의 차를 타고 숲으로 둘러싸인 집에 도착해 처음으로 캠프멤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저희 캠프는 총 2주의 기간 중 한 번 이사를 하게 되어 일주일씩 각각 다른 지역의 다른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첫 주에 머물렀던 집에서는 주로 마당에서 진흙을 퍼다가 양동이와 도르래를 이용해 지붕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요. 낡은 성당을 개조하여 지붕아래 다락공간을 공연이나 발표회가 가능한 장소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삽질을 해보고 흙투성이가 된 채로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제가 속해있던 캠프에는 남자 멤버가 거의 없어 여자 멤버들끼리 힘쓰는 일까지 해내려다 보니 더욱 힘들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식사당번이 된 날 역시 8인분의 아침, 티타임, 점심, 저녁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하고 나면 하루가 금방 지나고는 했지요. 그래도 무거운 짐을 들 때는 나서서 도와주고, 한국 음식 맛있다며 최고라고 칭찬해주는 캠프 멤버들과 점점 친구가 되어가며 하루하루를 일과 추억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볶음밥을 해준 후 fried rice라고 설명해주었는데, 먹어보고 나서 이건 단순한 fried rice가 아니라 super rice라며 감동에 젖은 눈으로 제발 조리법을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 잊혀지지가 않네요.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것이 한국 음식이라고 설명하며 자부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몇 달 하다가 워크캠프에 참여했기에 영어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힘든 점은 바로 언어였는데요. 저와 터키인 캠프 멤버 한 명을 뺀 나머지 6명 모두 둘씩 짝지어 중복된 참가국 출신으로 본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프로그램에서 언급된 공용어는 영어였는데도요. 특히나 불편했던 점은 바로 캠프리더였습니다. 우연히도 캠프리더 두 명 모두 러시아 출신으로, 캠프기간 내내 영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해야 할 두 사람이 가장 많이 자신의 나라 말로 알아듣지 못할 둘만의 대화를 많이 했는데요. 물론 공지사항이나 의사소통을 위한 부분은 영어로 했지만, 아무래도 동고동락하는 중에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를 계속 듣는 것은 무척이나 소외감 느껴지는 일이었습니다. 어학연수를 하면서도 항상 한국인이 있는 환경에 있었는데, 처음으로 홀로 한국인이 되어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제법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자주 캠프에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캠프 총 책임자로 계셨던 아저씨도 영어보다 체코어가 편하다며 독일어와 체코어로만 거의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만약 캠프리더가 조금 더 성숙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었다면 더욱 즐거운 캠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아무래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캠프리더 두 명 모두 여름 내내 다수의 캠프에서 리더로 활동한 후 9월의 마지막 캠프에 온 상황이어서 체력적으로도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여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캠프 멤버 중 영어실력이 조금 부족한 멤버들에게는 공지사항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다며 짜증내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보며 리더로서의 자질과 소양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깨닫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크캠프 기간 중 제 인생에서 그 전으로도, 그 후로도 다시는 못할 것 같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는데요.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히치하이킹’입니다. 시골 도시로부터도 5km 이상 떨어진 곳에 숙소가 있어 장을 보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등 도시에 다녀와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요. 캠프에 제공된 자동차나 자전거가 딱히 없어 저희가 도시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한 시간 넘게 걷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저와 친구들이,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독일의 시골 사람들에게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길목에서 엄지 손가락을 올린 채 기다리기만 하다가,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들을 보며 주머니에 있던 펜과 자투리 종이를 이용해 목적지가 적힌 팻말을 만들고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한적한 시골길에 동양인 소녀들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광경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항상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독일어로 감사하다는 말만 겨우 배워 그 말만 반복해서 내뱉는데도 목적지까지 친절히 데려다 주고 안아주시던 따뜻한 분들의 마음이 참 마음에 남습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저희를 딸처럼 여겨 용돈을 쥐어주려 하셨던 한 중년 부부에게 받은 감동은, 끝끝내 거절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그들과 소통했던 마음,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먹고 일하는 사이 정이 들어 헤어질 때 눈물을 흘려야 했던 캠프 멤버들과 소통했던 그 따뜻한 마음을, 아마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워크캠프 장소와 가장 가까운 베를린 공항으로 저가항공을 통해 이동한 후 혼자 힘으로 기차 티켓을 구입하고 이동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워크캠프 개최 지역이 외딴 곳에 있다 보니 이동시간도 길고 기차를 갈아타야 해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침낭을 끌어안고 두려움을 견디며 도착했을 때에는 스스로 해냈다는 쾌감과 워크캠프를 시작하는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중 나오신 분의 차를 타고 숲으로 둘러싸인 집에 도착해 처음으로 캠프멤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저희 캠프는 총 2주의 기간 중 한 번 이사를 하게 되어 일주일씩 각각 다른 지역의 다른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첫 주에 머물렀던 집에서는 주로 마당에서 진흙을 퍼다가 양동이와 도르래를 이용해 지붕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요. 낡은 성당을 개조하여 지붕아래 다락공간을 공연이나 발표회가 가능한 장소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삽질을 해보고 흙투성이가 된 채로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제가 속해있던 캠프에는 남자 멤버가 거의 없어 여자 멤버들끼리 힘쓰는 일까지 해내려다 보니 더욱 힘들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식사당번이 된 날 역시 8인분의 아침, 티타임, 점심, 저녁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하고 나면 하루가 금방 지나고는 했지요. 그래도 무거운 짐을 들 때는 나서서 도와주고, 한국 음식 맛있다며 최고라고 칭찬해주는 캠프 멤버들과 점점 친구가 되어가며 하루하루를 일과 추억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볶음밥을 해준 후 fried rice라고 설명해주었는데, 먹어보고 나서 이건 단순한 fried rice가 아니라 super rice라며 감동에 젖은 눈으로 제발 조리법을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 잊혀지지가 않네요.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것이 한국 음식이라고 설명하며 자부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몇 달 하다가 워크캠프에 참여했기에 영어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힘든 점은 바로 언어였는데요. 저와 터키인 캠프 멤버 한 명을 뺀 나머지 6명 모두 둘씩 짝지어 중복된 참가국 출신으로 본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프로그램에서 언급된 공용어는 영어였는데도요. 특히나 불편했던 점은 바로 캠프리더였습니다. 우연히도 캠프리더 두 명 모두 러시아 출신으로, 캠프기간 내내 영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해야 할 두 사람이 가장 많이 자신의 나라 말로 알아듣지 못할 둘만의 대화를 많이 했는데요. 물론 공지사항이나 의사소통을 위한 부분은 영어로 했지만, 아무래도 동고동락하는 중에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를 계속 듣는 것은 무척이나 소외감 느껴지는 일이었습니다. 어학연수를 하면서도 항상 한국인이 있는 환경에 있었는데, 처음으로 홀로 한국인이 되어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제법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자주 캠프에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캠프 총 책임자로 계셨던 아저씨도 영어보다 체코어가 편하다며 독일어와 체코어로만 거의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만약 캠프리더가 조금 더 성숙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었다면 더욱 즐거운 캠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아무래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캠프리더 두 명 모두 여름 내내 다수의 캠프에서 리더로 활동한 후 9월의 마지막 캠프에 온 상황이어서 체력적으로도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여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캠프 멤버 중 영어실력이 조금 부족한 멤버들에게는 공지사항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다며 짜증내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보며 리더로서의 자질과 소양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깨닫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크캠프 기간 중 제 인생에서 그 전으로도, 그 후로도 다시는 못할 것 같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는데요.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히치하이킹’입니다. 시골 도시로부터도 5km 이상 떨어진 곳에 숙소가 있어 장을 보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등 도시에 다녀와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요. 캠프에 제공된 자동차나 자전거가 딱히 없어 저희가 도시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한 시간 넘게 걷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저와 친구들이,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독일의 시골 사람들에게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길목에서 엄지 손가락을 올린 채 기다리기만 하다가,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들을 보며 주머니에 있던 펜과 자투리 종이를 이용해 목적지가 적힌 팻말을 만들고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한적한 시골길에 동양인 소녀들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광경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항상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독일어로 감사하다는 말만 겨우 배워 그 말만 반복해서 내뱉는데도 목적지까지 친절히 데려다 주고 안아주시던 따뜻한 분들의 마음이 참 마음에 남습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저희를 딸처럼 여겨 용돈을 쥐어주려 하셨던 한 중년 부부에게 받은 감동은, 끝끝내 거절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그들과 소통했던 마음,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먹고 일하는 사이 정이 들어 헤어질 때 눈물을 흘려야 했던 캠프 멤버들과 소통했던 그 따뜻한 마음을, 아마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