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멕시코, 익숙함 속의 특별한 만남
Assisting a Childs Dream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나의 워크캠프 참가경로는 보통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멕시코에서 이미 교환학생으로 생활 중이었고 멕시코에서의 삶에 거의 완전 적응된 상태에서, 곧 떠날 날을 앞두고 그냥 떠나기엔 아쉬움에 워크캠프를 통해 마지막 추억을 만들 목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먼 본국에서 날아온 참가자들과는 달리 나는 그냥 원래 살던 도시에서 워크캠프 도시로 버스 타고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어려움 없이 무사히 도착했고, 다들 낯설어 하는 멕시코에 나는 큰 감흥이 없었고 익숙했다. 이런 점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나의 경우의 장단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처럼 이미 살던 나라에서 워크캠프를 하는 경우에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언어적인 문제도 거의 없어 워크캠프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대신에 새로움에 대한 설렘이 덜했고 모험하는 데에 느끼는 짜릿함도 없었다. 반대로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새로운 곳으로 왔을 경우에는 말도 안 통하고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에 (특히나 멕시코라면 다들 불안했을 터) 그리고 문화충격과 생활방식 차이로 인한 불편함이 힘들 수도 있지만 그만큼 더 큰 추억이 되고 모든 것이 다 새로워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편안함이라는 장점을 누렸으니 다음 번엔 내가 몰랐던 미지의 세계로 캠프를 신청해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감명을 잔뜩 받아볼 생각이다.
아직도 워크캠프 처음 도착한 날이 생생하다. 나는 꼴리마라는 내가 칠 개월을 집같이 지냈던 도시를 떠나 밤늦게 버스를 타고 새벽 다섯 시 즈음에 레온에 도착했다. 미팅시간이 오후 한시였나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던 기억이 난다. 꼴리마를 떠난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캠프 숙소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고 소개하느라 정신 없었다. 이미 도착해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뒤늦게 한 명 한 명씩 계속 합류해 최종적으로 열두 명의 워크캠프 멤버들이 모였다. 한국인 세 명, 일본인 세 명, 멕시코인 세 명, 폴라드인 한 명, 독일인 한 명, 캐나다인 한 명.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그래도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꽤 길어졌다. 나를 포함한 몇몇은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말 하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려 대화가 오래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기 나라에 대해 얘기하고 상대방의 나라에 대해 묻고 듣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흥미로운 것인지 그 때 처음 느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분단을 겪고 통일을 이룬 독일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과도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는 사이였기에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듣고 이해하는 시간이 꽤나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았던 것은 외국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우리나라에 대해 정확히 제대로 많은 것을 이미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대해 질문했을 때 우리나라에 어떤 오명을 씌우거나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 외국인은 내가 말하는 우리나라가 전부이고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작지만 꽤나 소란스러운 나라였다.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므로 외국인들로 하여금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내 소개를 하는 순간 이어지는 대개의 외국인들의 공통 질문은 남한에서 왔느냐 북한에서 왔느냐 이다. 그 다음에 대화가 깊어지면 외국친구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분단의 원인, 역사적 배경, 현재 북한의 상태와 북한과 우리의 관계, 우리도 북한에 갈 수 있는지, 아직도 다들 통일을 원하는지 꽤나 심도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내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열심히 답변하고 설명했지만 좀 더 역사를 깊이 있게 알고 있었다면, 영어를 더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아쉬웠다. 어쨌든 꽤나 다국적으로 구성된 워크캠프가 드디어 시작되었고 이렇게 즐거운 문화교류의 시간은 캠프기간 내내 이어졌다.
내가 선택한 워크캠프의 주제는 아이들이었다. 내가 주제를 선택하는 데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부분은 참가비용이다. 나는 이미 외국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으므로 제일 부담되지 않는 프로그램들로 추려냈고 그 중에 내가 너무도 좋아하고 활동을 잘 할 자신 있는 아이들에 관련된 프로그램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프로그램은 멕시코에서 신발제조로 매우 유명한 도시 레온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캠프였고 레온 공대에서 대부분을 주관했다. 오전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레온의 이곳 저곳을 관광하는 일과가 대부분이었다. 재미있고 흥미로웠지만 아쉬운 점도 많이 남았다. 캠프가 다 끝나고 들었던 생각은 이번 프로그램의 주 목적이 진실된 봉사활동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총 보름간의 캠프기간 중 봉사활동을 나간 날 수는 6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말은 일하지 않기 때문에 빼고 몇몇 평일에는 주관하는 대학에서 그 학교로 우릴 데려가 우릴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워크캠프에 대해 설명하고 그 학교 학생들과 만나보도록 하는 시간을 만들거나 레온의 유명한 곳을 보여주거나 단순히 쇼핑센터에 쇼핑을 하러 가는 봉사활동과 관련 없는 활동들이 너무 많았다. 이렇다 보니 제대로 일한 날은 6일밖에 되지 않았고 너무 늘어지는 일정으로 인해 지루하고 흥미가 떨어지는 시간들도 있었다. 그래서 학교와 도시를 홍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프로그램들을 계획한 듯한 학교 측에 좀 실망하고 워크캠프가 ‘워크’ 캠프답지 못 한 것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일 한 날들은 항상 보람차고 즐거웠다.
본격적인 봉사활동은 이틀씩 세 기관에 방문해 아이들을 봐주는 일이었는데, 첫 번째 간 곳은 지역병원이었다. 공립이라 정말 사람들이 많았고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아픈 아이들을 만나 위로해주고 놀아주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었지만 아무래도 멕시코 아이들이라 쉽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아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나조차도 아이들의 옹알거리는 스페인어를 알아듣기 어려워 진땀을 뺐는데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멤버들은 정말 어려워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붙어서 도와줘야 했다. 간단한 통역일지라도 내가 통역사 같은 역할이 되었을 때에는 긴장되기도 하고 책임감도 무겁게 느꼈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스페인어를 공부한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고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처음엔 모르는 사람인데다가 외국인이라 무척 낯설어하고 거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조금씩 친해지고 아이들을 웃게 하는 과정이 너무 보람차고 즐거웠다. 다들 아픈 병원에서 늘 같은 일상에 지치고 미래에 대한 별 기대가 없는 듯 어두워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들이 마음 아팠다. 두 번째 방문한 기관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학교였는데 여기는 분위기가 정 반대였다. 아이들은 모두 누구보다 해맑고 행복해 보였다. 세 네 살 애기들부터 열일곱 열여덟 살 청소년들까지 다같이 지내는 학교였는데 아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정말 산만하고 방방 뛰어다니고 돌아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봉사활동 중에서 가장 신체적 노동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만큼 제일 즐거웠고 연신 웃어대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끊임없이 웃기만 하다 왔던 것 같다. 아이들은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우리에게 전혀 거부감 없이 다가와 안기고 정을 주었다. 헤어질 때도 내일 또 만나 했지만 그럴 수 없어 너무 아쉬웠고 헤어지기 싫어 매달리는 애기들과 억지로 이별할 때는 정말이지 내일 또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번째 기관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장애우들을 위한 복합복지센터였는데 멕시코에도 이런 최신식 시설의 장애인복지센터가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시설들이나 기술들이 너무 좋아 가난한 사람들은 오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저렴하게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받는 방식으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기부금도 꾸준히 받기 때문에 누구든 부담 없이 올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기관이 있다니 장애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진료순서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남는 아이들 혹은 부모님이 볼일이 있어 혼자 기다려야 하는 아이들을 지루하지 않게 놀아주고 부모님들은 안심할 수 있게 돌봐주는 봉사를 했다. 그냥 아이 돌보기도 어려운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으니 정말 쉽지 않았다. 신체노동이 과다한 워크캠프의 다른 프로그램들에 비해 이 프로그램은 매우 쉬워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우는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한 시간을 품에 안고 흔들어줄 때에는 어떤 노동보다도 힘들었다고 확신한다. 아이를 유모차에 내려놓는 순간 다시 울었기 때문에 엄마가 올 때까지 계속 안고 흔들어주어야 했다. 그 때 어머니들의 위대함을 온 몸으로 깨닫고 여느 남성 못지않게 강인한 어머니들의 팔뚝을 존경할 수 밖에 없었으며 날 이렇게 고생하며 키워주셨을 엄마께 진심으로 감사해야겠구나 보답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시간 외의 자유시간에는 다같이 공원으로 도시락 싸 들고 놀러 가기도 하고 밤에 떼낄라 파티를 하기도 하고 근처 바(bar)로 술 한잔 하러 가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은 매일 팀을 나누어 직접 요리해서 식사 준비를 하곤 했는데 다들 꽤나 요리를 잘해서 각국의 음식을 즐겁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불고기, 크림 파스타, 볶음밥, 라면을 준비했었는데 한국음식을 위한 한국 고유의 재료들이 없어서 더 제대로 한국의 맛을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래도 다들 맛있다고 먹어줘서 굉장히 뿌듯했고 자기나라 요리를 정말 잘 할 줄 아는 것도 애국의 일환임을 다음 워크캠프 참가자들에게 일러주고 싶다. 일본 친구들이 현명하게도 본국에서 여러 일본 재료들을 챙겨와 미소된장국 등 진짜 일본 음식들을 선보여 찬사를 받았을 때에는 고추장 좀 챙겨올 걸 너무도 아쉬웠었다. 일요일에는 늘 가까운 도시로 짧은 관광을 다녀왔는데 내가 멕시코에 있는 동안 여러 도시를 여행했지만 아쉽게 못 갔던 곳으로 이번 기회에 보고 올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나에게 이번 워크캠프는 아주 백 프로 만족스러웠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인상 깊었고 느끼는 것도 많았고 분명히 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열 두 명이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 있는 작은 집에서 북적북적 대며 열악하게 생활했던 것도 그 당시에는 얼른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고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 약간의 트러블이 생기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가 언제 멕시코사람, 일본사람, 폴란드사람, 캐나다사람 그리고 독일사람과 한 지붕아래에서 같이 자고 먹고 생활하는 이런 진기한 경험을 해보겠는가. 이 자체가 바로 워크캠프이고 그 묘미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아직까지도 페이스 북을 통해 연락이 닿는 워크캠프 친구들과의 인연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라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 워크캠프는 가본 적 없는 신기한 나라로 이번 워크캠프를 통해 느끼고 반성했던 점을 보완해서 다시 한 번 참가해보고 싶다.
아직도 워크캠프 처음 도착한 날이 생생하다. 나는 꼴리마라는 내가 칠 개월을 집같이 지냈던 도시를 떠나 밤늦게 버스를 타고 새벽 다섯 시 즈음에 레온에 도착했다. 미팅시간이 오후 한시였나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던 기억이 난다. 꼴리마를 떠난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캠프 숙소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고 소개하느라 정신 없었다. 이미 도착해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뒤늦게 한 명 한 명씩 계속 합류해 최종적으로 열두 명의 워크캠프 멤버들이 모였다. 한국인 세 명, 일본인 세 명, 멕시코인 세 명, 폴라드인 한 명, 독일인 한 명, 캐나다인 한 명.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그래도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꽤 길어졌다. 나를 포함한 몇몇은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말 하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려 대화가 오래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기 나라에 대해 얘기하고 상대방의 나라에 대해 묻고 듣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흥미로운 것인지 그 때 처음 느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분단을 겪고 통일을 이룬 독일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과도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는 사이였기에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듣고 이해하는 시간이 꽤나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았던 것은 외국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우리나라에 대해 정확히 제대로 많은 것을 이미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대해 질문했을 때 우리나라에 어떤 오명을 씌우거나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 외국인은 내가 말하는 우리나라가 전부이고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작지만 꽤나 소란스러운 나라였다.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므로 외국인들로 하여금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내 소개를 하는 순간 이어지는 대개의 외국인들의 공통 질문은 남한에서 왔느냐 북한에서 왔느냐 이다. 그 다음에 대화가 깊어지면 외국친구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분단의 원인, 역사적 배경, 현재 북한의 상태와 북한과 우리의 관계, 우리도 북한에 갈 수 있는지, 아직도 다들 통일을 원하는지 꽤나 심도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내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열심히 답변하고 설명했지만 좀 더 역사를 깊이 있게 알고 있었다면, 영어를 더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아쉬웠다. 어쨌든 꽤나 다국적으로 구성된 워크캠프가 드디어 시작되었고 이렇게 즐거운 문화교류의 시간은 캠프기간 내내 이어졌다.
내가 선택한 워크캠프의 주제는 아이들이었다. 내가 주제를 선택하는 데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부분은 참가비용이다. 나는 이미 외국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으므로 제일 부담되지 않는 프로그램들로 추려냈고 그 중에 내가 너무도 좋아하고 활동을 잘 할 자신 있는 아이들에 관련된 프로그램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프로그램은 멕시코에서 신발제조로 매우 유명한 도시 레온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캠프였고 레온 공대에서 대부분을 주관했다. 오전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레온의 이곳 저곳을 관광하는 일과가 대부분이었다. 재미있고 흥미로웠지만 아쉬운 점도 많이 남았다. 캠프가 다 끝나고 들었던 생각은 이번 프로그램의 주 목적이 진실된 봉사활동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총 보름간의 캠프기간 중 봉사활동을 나간 날 수는 6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말은 일하지 않기 때문에 빼고 몇몇 평일에는 주관하는 대학에서 그 학교로 우릴 데려가 우릴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워크캠프에 대해 설명하고 그 학교 학생들과 만나보도록 하는 시간을 만들거나 레온의 유명한 곳을 보여주거나 단순히 쇼핑센터에 쇼핑을 하러 가는 봉사활동과 관련 없는 활동들이 너무 많았다. 이렇다 보니 제대로 일한 날은 6일밖에 되지 않았고 너무 늘어지는 일정으로 인해 지루하고 흥미가 떨어지는 시간들도 있었다. 그래서 학교와 도시를 홍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프로그램들을 계획한 듯한 학교 측에 좀 실망하고 워크캠프가 ‘워크’ 캠프답지 못 한 것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일 한 날들은 항상 보람차고 즐거웠다.
본격적인 봉사활동은 이틀씩 세 기관에 방문해 아이들을 봐주는 일이었는데, 첫 번째 간 곳은 지역병원이었다. 공립이라 정말 사람들이 많았고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아픈 아이들을 만나 위로해주고 놀아주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었지만 아무래도 멕시코 아이들이라 쉽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아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나조차도 아이들의 옹알거리는 스페인어를 알아듣기 어려워 진땀을 뺐는데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멤버들은 정말 어려워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붙어서 도와줘야 했다. 간단한 통역일지라도 내가 통역사 같은 역할이 되었을 때에는 긴장되기도 하고 책임감도 무겁게 느꼈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스페인어를 공부한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고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처음엔 모르는 사람인데다가 외국인이라 무척 낯설어하고 거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조금씩 친해지고 아이들을 웃게 하는 과정이 너무 보람차고 즐거웠다. 다들 아픈 병원에서 늘 같은 일상에 지치고 미래에 대한 별 기대가 없는 듯 어두워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들이 마음 아팠다. 두 번째 방문한 기관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학교였는데 여기는 분위기가 정 반대였다. 아이들은 모두 누구보다 해맑고 행복해 보였다. 세 네 살 애기들부터 열일곱 열여덟 살 청소년들까지 다같이 지내는 학교였는데 아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정말 산만하고 방방 뛰어다니고 돌아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봉사활동 중에서 가장 신체적 노동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만큼 제일 즐거웠고 연신 웃어대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끊임없이 웃기만 하다 왔던 것 같다. 아이들은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우리에게 전혀 거부감 없이 다가와 안기고 정을 주었다. 헤어질 때도 내일 또 만나 했지만 그럴 수 없어 너무 아쉬웠고 헤어지기 싫어 매달리는 애기들과 억지로 이별할 때는 정말이지 내일 또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번째 기관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장애우들을 위한 복합복지센터였는데 멕시코에도 이런 최신식 시설의 장애인복지센터가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시설들이나 기술들이 너무 좋아 가난한 사람들은 오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저렴하게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받는 방식으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기부금도 꾸준히 받기 때문에 누구든 부담 없이 올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기관이 있다니 장애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진료순서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남는 아이들 혹은 부모님이 볼일이 있어 혼자 기다려야 하는 아이들을 지루하지 않게 놀아주고 부모님들은 안심할 수 있게 돌봐주는 봉사를 했다. 그냥 아이 돌보기도 어려운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으니 정말 쉽지 않았다. 신체노동이 과다한 워크캠프의 다른 프로그램들에 비해 이 프로그램은 매우 쉬워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우는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한 시간을 품에 안고 흔들어줄 때에는 어떤 노동보다도 힘들었다고 확신한다. 아이를 유모차에 내려놓는 순간 다시 울었기 때문에 엄마가 올 때까지 계속 안고 흔들어주어야 했다. 그 때 어머니들의 위대함을 온 몸으로 깨닫고 여느 남성 못지않게 강인한 어머니들의 팔뚝을 존경할 수 밖에 없었으며 날 이렇게 고생하며 키워주셨을 엄마께 진심으로 감사해야겠구나 보답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시간 외의 자유시간에는 다같이 공원으로 도시락 싸 들고 놀러 가기도 하고 밤에 떼낄라 파티를 하기도 하고 근처 바(bar)로 술 한잔 하러 가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은 매일 팀을 나누어 직접 요리해서 식사 준비를 하곤 했는데 다들 꽤나 요리를 잘해서 각국의 음식을 즐겁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불고기, 크림 파스타, 볶음밥, 라면을 준비했었는데 한국음식을 위한 한국 고유의 재료들이 없어서 더 제대로 한국의 맛을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래도 다들 맛있다고 먹어줘서 굉장히 뿌듯했고 자기나라 요리를 정말 잘 할 줄 아는 것도 애국의 일환임을 다음 워크캠프 참가자들에게 일러주고 싶다. 일본 친구들이 현명하게도 본국에서 여러 일본 재료들을 챙겨와 미소된장국 등 진짜 일본 음식들을 선보여 찬사를 받았을 때에는 고추장 좀 챙겨올 걸 너무도 아쉬웠었다. 일요일에는 늘 가까운 도시로 짧은 관광을 다녀왔는데 내가 멕시코에 있는 동안 여러 도시를 여행했지만 아쉽게 못 갔던 곳으로 이번 기회에 보고 올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나에게 이번 워크캠프는 아주 백 프로 만족스러웠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인상 깊었고 느끼는 것도 많았고 분명히 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열 두 명이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 있는 작은 집에서 북적북적 대며 열악하게 생활했던 것도 그 당시에는 얼른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고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 약간의 트러블이 생기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가 언제 멕시코사람, 일본사람, 폴란드사람, 캐나다사람 그리고 독일사람과 한 지붕아래에서 같이 자고 먹고 생활하는 이런 진기한 경험을 해보겠는가. 이 자체가 바로 워크캠프이고 그 묘미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아직까지도 페이스 북을 통해 연락이 닿는 워크캠프 친구들과의 인연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라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 워크캠프는 가본 적 없는 신기한 나라로 이번 워크캠프를 통해 느끼고 반성했던 점을 보완해서 다시 한 번 참가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