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스위스 시골, 강남스타일과 쉼표 하나
AUTUMN CAMP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하루하루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있는지도 모르는 나날들이 계속 되었다.
쉼표를 찍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시간에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나는 영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껴왔다. 전혀 다른 문화와 배경 속에서 자란 이들. 그들과 나의 모국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써 의사소통하며 알아간다는 일은 너무도 흥미로운 일이다!
휴학을 하고 외국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교환학생이나 워킹홀리데이 등의 장기체류를 하고싶었지만 기회를 모색하다보니 최종적으로는 여행과 워크캠프 참여로 결정하게 되었다.
장소는 남미와 인도, 유럽을 후보에 두고 고민하던 끝에 처음 해외여행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유럽으로 정했다. 여행 일정이나 프로그램 주제를 염두에 두고보니 여행 초반에 워크캠프가 들어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순 봉사가 아니라 아이들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위스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더나은세상에 접속하여 프로그램 검색을 하였는데, 스위스의 경우 올라온 당일 바로 지원서를 보냈고 해당 프로그램은 빠르게 마감되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쉼표를 찍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시간에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나는 영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껴왔다. 전혀 다른 문화와 배경 속에서 자란 이들. 그들과 나의 모국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써 의사소통하며 알아간다는 일은 너무도 흥미로운 일이다!
휴학을 하고 외국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교환학생이나 워킹홀리데이 등의 장기체류를 하고싶었지만 기회를 모색하다보니 최종적으로는 여행과 워크캠프 참여로 결정하게 되었다.
장소는 남미와 인도, 유럽을 후보에 두고 고민하던 끝에 처음 해외여행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유럽으로 정했다. 여행 일정이나 프로그램 주제를 염두에 두고보니 여행 초반에 워크캠프가 들어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순 봉사가 아니라 아이들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위스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더나은세상에 접속하여 프로그램 검색을 하였는데, 스위스의 경우 올라온 당일 바로 지원서를 보냈고 해당 프로그램은 빠르게 마감되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현지 활동 및 특별했던 에피소드
이번 워크캠프는 나에게 있어 첫 해외체류이므로 여러모로 긴장되는 일이 많았다.
그 걱정은 맨 처음 infosheet을 받았을때부터 생겼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이 국제봉사자는 단 3명이며 캠프리더 또한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국제봉사자 중에 한국인은 나 한명 뿐이라고 하였다. 아니 도대체 무슨 봉사활동이길래 봉사자는 단 3명뿐이고 캠프리더도 없는 것이더냐, 게다가 잠은 텐트에서 잔다고 했다. 과연 제대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는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쓸데없는 상상과 걱정이 무한 날개를 펼쳤다. 워크캠프를 총괄하는 사무실에 몇번씩 전화하여 이에 대해 문의하고 확인을 요청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캠프에 도착하고 나서 이 모든 걱정은 기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참여한 캠프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는 언어캠프의 일종이었다. 그 캠프를 운영하는 회사의 관리자가 3명, 선생님이 6명, 스위스국내 봉사자가 6명, 국제봉사자가 3명, 그래서 총 18명의 스텝진이 캠프를 이끌어 나갔다. 거기에 학생들까지 2~30명 정도되어 그야말로 사람으로 북적북적, 그리고 꽤나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캠프였다.
내가 했던 일은 주로 봉사자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팀을 이루어 요리를 하고 식사준비와 배식, 뒷정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3주동안 머물렀는데, 국내 봉사자나 직원의 경우 2주만 머무는 경우도 있었고 국제봉사자들은 3주를 머물렀다. 3주동안 언어캠프가 2주,1주 코스로 진행되었는데 때문에 인원수의 변동이 있었고, 후반부에는 학생수는 줄었지만 직원또한 줄어서 우리가 요리를 해야할 횟수가 늘었었다.
우리가 캠프에서 하는 일은 당번을 정해 요리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것, 그리고 캠프 프로그램내 소풍이 있으면 그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당번인 경우도 있었고 나의 경우 친구와 당번을 바꿔 인근 도시에 놀러가기도 하였다. 캠프가 열렸던 Cudrefin의 경우 뉴사텔이라는 호수 근처에 있어 시간나면 호숫가에 산책을 가 발을 담그고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고, 음악을 들으며 누워서 낮잠을 자기도 하였다. 여름에 열리는 캠프의 경우 수영을 한다고 했고, 우리가 갔을때 몇몇아이들은 수영을 하기도 했지만 나와 봉사자 친구들은 너무도 찬 호숫물에 몸만 잠시 담그는데 만족했다. 주말엔 쉬는 날로,캠프 전체를 대청소하였다.
일은 매우 쉬웠다. 요리 재료준비와 정리로, 내평생 그렇게 많은 양파와 감자를 썰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 일것이다. 또한 나는 평생 요리하며 칼에 손을 벨 모든 상처를 낸 듯했다.
스텝들에게 부엌은 오픈되어 있어 우리는 먹고싶은 음식들을 무한대로!! 먹을 수 있었다.
아침에 눈 떠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우리가 하는 요리 뿐만이 아니라 창고에 쌓여 있는 빵, 초콜렛, 과자, 아이스크림, 그리고 와인과 맥주까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은 커피로 시작하여 저녁은 맥주와 와인으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숙소의 경우 날씨가 그리 따뜻하지 않은 관계로 캠프안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층침대가 있는 방을 주었는데, 여느 게스트하우스와 같은 환경으로 편하게 지냈다.
봉사자들의 경우 연령이 10대 후반이 많았으며 나의 경우 봉사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으며 캠프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나이에 대해 크게 상관하지 않았으며, 다 같이 일하고 하루종일 생활하기 때문에 이야기 할 기회도 많았으며 때문에 처음엔 서먹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자연스레 친해져 몇몇은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하고 있다.
유난히 죽이 잘 맞던 웃음 멋진 사진작가 에드워드, 한국어 잘 따라하던 속깊은 애어른 일로나, 날 잘챙겨주었던, 그래서인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헤어졌던 샨탈, 개성가득 유쾌한 타마라, 생긴건 엘픈데 하는 짓은 괴짜인 재주많은 요리사 삼송, 전형적인 모범생에 5개국어 능력자 앤디,캠프 마지막날에야 동갑인지 알았던 어른스럽던 캠프리더 루비샤, 능구렁이같은, 리더쉽 하나는 최고였던 루벤, 한국의 여느 친구들처럼 장난치고 놀리며 서로 친해졌던 장난꾸러기 기욤, 랩잘하는 센스쟁이 티모, 의사소통은 잘 안되었지만 정많고 잘 챙겨주던 베로니카, 유쾌발랄 해피바이러스 빡빡이선생님 맥심, 맥심의 유쾌한 여자친구, 그리고 그들의 개 세연, 영화배우 같은 외모에 유머감각 넘치던 할아버지 윌리, 나만 보면 강냄스딸! 이라며 노래하던 키 큰 안경쓴 아이까지.
그 누가 머나먼 스위스 시골에서 멕시코,스위스,프랑스,세르비아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될지 알았겠는가.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언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어가 잘 되면 원활하고 더 심도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에드워드 같은 경우엔 영어로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나이도 동갑이고 성격도 비슷해 붙어다니면서 사랑과 연애, 군대, 진로, 미래 등과 같은 심도 깊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활이다 보니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통하는 면들이 있었다.
그 걱정은 맨 처음 infosheet을 받았을때부터 생겼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이 국제봉사자는 단 3명이며 캠프리더 또한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국제봉사자 중에 한국인은 나 한명 뿐이라고 하였다. 아니 도대체 무슨 봉사활동이길래 봉사자는 단 3명뿐이고 캠프리더도 없는 것이더냐, 게다가 잠은 텐트에서 잔다고 했다. 과연 제대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는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쓸데없는 상상과 걱정이 무한 날개를 펼쳤다. 워크캠프를 총괄하는 사무실에 몇번씩 전화하여 이에 대해 문의하고 확인을 요청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캠프에 도착하고 나서 이 모든 걱정은 기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참여한 캠프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는 언어캠프의 일종이었다. 그 캠프를 운영하는 회사의 관리자가 3명, 선생님이 6명, 스위스국내 봉사자가 6명, 국제봉사자가 3명, 그래서 총 18명의 스텝진이 캠프를 이끌어 나갔다. 거기에 학생들까지 2~30명 정도되어 그야말로 사람으로 북적북적, 그리고 꽤나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캠프였다.
내가 했던 일은 주로 봉사자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팀을 이루어 요리를 하고 식사준비와 배식, 뒷정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3주동안 머물렀는데, 국내 봉사자나 직원의 경우 2주만 머무는 경우도 있었고 국제봉사자들은 3주를 머물렀다. 3주동안 언어캠프가 2주,1주 코스로 진행되었는데 때문에 인원수의 변동이 있었고, 후반부에는 학생수는 줄었지만 직원또한 줄어서 우리가 요리를 해야할 횟수가 늘었었다.
우리가 캠프에서 하는 일은 당번을 정해 요리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것, 그리고 캠프 프로그램내 소풍이 있으면 그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당번인 경우도 있었고 나의 경우 친구와 당번을 바꿔 인근 도시에 놀러가기도 하였다. 캠프가 열렸던 Cudrefin의 경우 뉴사텔이라는 호수 근처에 있어 시간나면 호숫가에 산책을 가 발을 담그고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고, 음악을 들으며 누워서 낮잠을 자기도 하였다. 여름에 열리는 캠프의 경우 수영을 한다고 했고, 우리가 갔을때 몇몇아이들은 수영을 하기도 했지만 나와 봉사자 친구들은 너무도 찬 호숫물에 몸만 잠시 담그는데 만족했다. 주말엔 쉬는 날로,캠프 전체를 대청소하였다.
일은 매우 쉬웠다. 요리 재료준비와 정리로, 내평생 그렇게 많은 양파와 감자를 썰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 일것이다. 또한 나는 평생 요리하며 칼에 손을 벨 모든 상처를 낸 듯했다.
스텝들에게 부엌은 오픈되어 있어 우리는 먹고싶은 음식들을 무한대로!! 먹을 수 있었다.
아침에 눈 떠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우리가 하는 요리 뿐만이 아니라 창고에 쌓여 있는 빵, 초콜렛, 과자, 아이스크림, 그리고 와인과 맥주까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은 커피로 시작하여 저녁은 맥주와 와인으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숙소의 경우 날씨가 그리 따뜻하지 않은 관계로 캠프안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층침대가 있는 방을 주었는데, 여느 게스트하우스와 같은 환경으로 편하게 지냈다.
봉사자들의 경우 연령이 10대 후반이 많았으며 나의 경우 봉사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으며 캠프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나이에 대해 크게 상관하지 않았으며, 다 같이 일하고 하루종일 생활하기 때문에 이야기 할 기회도 많았으며 때문에 처음엔 서먹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자연스레 친해져 몇몇은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하고 있다.
유난히 죽이 잘 맞던 웃음 멋진 사진작가 에드워드, 한국어 잘 따라하던 속깊은 애어른 일로나, 날 잘챙겨주었던, 그래서인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헤어졌던 샨탈, 개성가득 유쾌한 타마라, 생긴건 엘픈데 하는 짓은 괴짜인 재주많은 요리사 삼송, 전형적인 모범생에 5개국어 능력자 앤디,캠프 마지막날에야 동갑인지 알았던 어른스럽던 캠프리더 루비샤, 능구렁이같은, 리더쉽 하나는 최고였던 루벤, 한국의 여느 친구들처럼 장난치고 놀리며 서로 친해졌던 장난꾸러기 기욤, 랩잘하는 센스쟁이 티모, 의사소통은 잘 안되었지만 정많고 잘 챙겨주던 베로니카, 유쾌발랄 해피바이러스 빡빡이선생님 맥심, 맥심의 유쾌한 여자친구, 그리고 그들의 개 세연, 영화배우 같은 외모에 유머감각 넘치던 할아버지 윌리, 나만 보면 강냄스딸! 이라며 노래하던 키 큰 안경쓴 아이까지.
그 누가 머나먼 스위스 시골에서 멕시코,스위스,프랑스,세르비아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될지 알았겠는가.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언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어가 잘 되면 원활하고 더 심도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에드워드 같은 경우엔 영어로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나이도 동갑이고 성격도 비슷해 붙어다니면서 사랑과 연애, 군대, 진로, 미래 등과 같은 심도 깊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활이다 보니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통하는 면들이 있었다.
참가 후 변화와 느낀 점, 하고 싶은 이야기
매일 밤 10시가 되면 비어타임으로, 스텝들 모두 모여 맥주나 와인을 먹으며 카드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서로 말도 잘 안하고 낯을 가렸지만, 하루종일 붙어있다보니 마음통하는 친구들은 캠프가 끝날때 쯔음 모두 친해지게 되었다.
캠프에서는 매주 디스코파티와 가라오케를 진행했는데, 때는 2012년 10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휩쓸 때였다. 내가 간 왠만한 시골 중의 최고 시골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스위스의 시골에서, 강남스타일은 언제나 디스코파티와 가라오케의 정점에서 나오게 되었다.
첫째주 가라오케에서 친구들이 나에게 노래를 해달라고 제안하였다. 사실 초반이라 서먹하기도 하고 예의상 거절했었는데, 이 친구들은 우리와 달라서 거절하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줄 아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강남스타일 춤을 한국에서 마스터 해온 상태였는데 말이다. 첫째주는 어벙벙한 아쉬운 상태로 지나가고 둘째주에, 자신있게 나서서 강남스타일을 부르고 말춤을 추었고 그때부터 캠프에 있는 사람들, 특히 어린 학생들의 경우 나만보면 "강냄스딸!" "오~~~섹시레이레~~"라며 흥얼거렸다. 스위스 어느 시골에서 나만 이해할 수 있는 한국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한국 춤을 추며 모두 신나 열광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처음 호숫가의 야경을 보고 감격했던 순간.
3주동안 나는 시간이 날때마다 호숫가에 가 누워서 빈둥빈둥 음악을 듣거나, 일기를 쓰고 편지를 썼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있어 나의 모든 것들과 오롯이 떨어져 있는 시간들.
학교도, 전공도, 가족도, 돈도 그 모든 것과는 떨어져 나 자신 그대로 새로운 세계와 만나야 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마주할때에 나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했다.
그 기간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이 가장 컸다.
3개월 만의 집. 오래만에 만나는 딸을 마중나오신 아버지. 막상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시는데 그 얼굴 한가득 반가운 웃음이 가득하시던 그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떠날때부터 도착할때까지 매일같이 염려에 걱정으로 연락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진수성찬 차려주시며 신나하시던 어머니. 언제 집에 오냐며 거짓말 치지 말라고 1시쯤 올꺼냐며
둘이 기다리고 있으면 꼭 내가 문 열고 올거같다며 내 그리움을 깊게 만들던 첫째 동생 그리고 둘째 동생. 막상 말은 제일 적게 하고 상대적으로 본 시간도 적을텐데 그리도 많이 생각나던 막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
닿을 수 없지만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금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들인다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시작이고
자기 발전을 위한 첫번째 단계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나에게는 참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여행 이후 나는 조금 더 자라있고 조금 더 깊어져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 또한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여행을 하며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좋은 친구들을 만나 심지어 스위스와 프랑스 친구집에서 각각 머무르기까지 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의외의, 가장 큰 수확으로 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휴학에 있어, 그리고 여행에 있어 워크캠프는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워크캠프를 통해 세계각국의 사람들의 친구들을 만나며 그들의 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하면서 또 새삼 우리와 별다를 것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 출발할때 비행기에서 콜라달란 말이 어려워 마냥 워터 플리즈, 라며 물만 먹었는데 워크캠프 이후에는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친구네 집에서 머무르며 그들의 실제 생활을 경험해 보기도 했으며, 숙소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며 이야기도 나누며 즐겁게 여행을 하게 되었다.
워크캠프에 참여하며 외국생활에 대해 빠르게 적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워크캠프가 없었다면 나의 여행은 밍숭맹숭 김빠진 콜라같았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하지 않고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서 후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짧지만 나의 대학생활,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았을때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것이 나의 인생과 선택의 폭을 넓혀 주었던 것 같다. 남들의 경험담이나 이야기만 듣고는 아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경험하는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일상의 굴레에서 살아가다 문득 나의 워크캠프, 여행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내가 정말 갔다왔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보아도 정말 내가 저 곳에 다녀왔던가, 라는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내 마음속에 남겨진 그때의 생각들. 가족에 대한 감정과 나의 미래, 나 자신에 대한 상념과 고민들을 마주하게 될때면 아, 정말 내가 갔다왔구나. 그리고 조금은, 많이 자라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위스 워크캠프와 유럽여행. 나에게 있어 꿈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망설이는가? 일단 떠나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기로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꿈과 같은, 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들 속에 요만큼 자라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캠프에서는 매주 디스코파티와 가라오케를 진행했는데, 때는 2012년 10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휩쓸 때였다. 내가 간 왠만한 시골 중의 최고 시골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스위스의 시골에서, 강남스타일은 언제나 디스코파티와 가라오케의 정점에서 나오게 되었다.
첫째주 가라오케에서 친구들이 나에게 노래를 해달라고 제안하였다. 사실 초반이라 서먹하기도 하고 예의상 거절했었는데, 이 친구들은 우리와 달라서 거절하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줄 아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강남스타일 춤을 한국에서 마스터 해온 상태였는데 말이다. 첫째주는 어벙벙한 아쉬운 상태로 지나가고 둘째주에, 자신있게 나서서 강남스타일을 부르고 말춤을 추었고 그때부터 캠프에 있는 사람들, 특히 어린 학생들의 경우 나만보면 "강냄스딸!" "오~~~섹시레이레~~"라며 흥얼거렸다. 스위스 어느 시골에서 나만 이해할 수 있는 한국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한국 춤을 추며 모두 신나 열광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처음 호숫가의 야경을 보고 감격했던 순간.
3주동안 나는 시간이 날때마다 호숫가에 가 누워서 빈둥빈둥 음악을 듣거나, 일기를 쓰고 편지를 썼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있어 나의 모든 것들과 오롯이 떨어져 있는 시간들.
학교도, 전공도, 가족도, 돈도 그 모든 것과는 떨어져 나 자신 그대로 새로운 세계와 만나야 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마주할때에 나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했다.
그 기간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이 가장 컸다.
3개월 만의 집. 오래만에 만나는 딸을 마중나오신 아버지. 막상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시는데 그 얼굴 한가득 반가운 웃음이 가득하시던 그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떠날때부터 도착할때까지 매일같이 염려에 걱정으로 연락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진수성찬 차려주시며 신나하시던 어머니. 언제 집에 오냐며 거짓말 치지 말라고 1시쯤 올꺼냐며
둘이 기다리고 있으면 꼭 내가 문 열고 올거같다며 내 그리움을 깊게 만들던 첫째 동생 그리고 둘째 동생. 막상 말은 제일 적게 하고 상대적으로 본 시간도 적을텐데 그리도 많이 생각나던 막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
닿을 수 없지만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금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들인다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시작이고
자기 발전을 위한 첫번째 단계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나에게는 참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여행 이후 나는 조금 더 자라있고 조금 더 깊어져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 또한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여행을 하며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좋은 친구들을 만나 심지어 스위스와 프랑스 친구집에서 각각 머무르기까지 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의외의, 가장 큰 수확으로 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휴학에 있어, 그리고 여행에 있어 워크캠프는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워크캠프를 통해 세계각국의 사람들의 친구들을 만나며 그들의 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하면서 또 새삼 우리와 별다를 것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 출발할때 비행기에서 콜라달란 말이 어려워 마냥 워터 플리즈, 라며 물만 먹었는데 워크캠프 이후에는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친구네 집에서 머무르며 그들의 실제 생활을 경험해 보기도 했으며, 숙소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며 이야기도 나누며 즐겁게 여행을 하게 되었다.
워크캠프에 참여하며 외국생활에 대해 빠르게 적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워크캠프가 없었다면 나의 여행은 밍숭맹숭 김빠진 콜라같았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하지 않고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서 후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짧지만 나의 대학생활,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았을때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것이 나의 인생과 선택의 폭을 넓혀 주었던 것 같다. 남들의 경험담이나 이야기만 듣고는 아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경험하는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일상의 굴레에서 살아가다 문득 나의 워크캠프, 여행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내가 정말 갔다왔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보아도 정말 내가 저 곳에 다녀왔던가, 라는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내 마음속에 남겨진 그때의 생각들. 가족에 대한 감정과 나의 미래, 나 자신에 대한 상념과 고민들을 마주하게 될때면 아, 정말 내가 갔다왔구나. 그리고 조금은, 많이 자라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위스 워크캠프와 유럽여행. 나에게 있어 꿈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망설이는가? 일단 떠나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기로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꿈과 같은, 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들 속에 요만큼 자라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