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케냐, 좌절 끝에 마주한 아프리카
Ebusakami Community Driven Development Project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7월 31일 한국을 떠나 8월 1일 오후에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나에게는 첫 해외여행인지라 떠나기 전부터 잔뜩 겁을 먹었다. 3일 아침9시에 미팅장소인 KVDA에서 우리는 다 모여서 오리엔테이션을 하였다. 4일 오전에 우리는 나이로비 컨츄리버스정류장에서 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탄 지 세시간이 지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7시간이 지나서 4시쯤 우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 때부터 좌절의 연속이였다. 어쩌면 시작부터가 꼬였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버스를 타서 백팩을 내 자리 선반위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는데 내리려고 보니 가방이 없어졌다. 누군가 잠시 조는 사이에 가져갔다. 그래서 버스에서 한참 찾았지만 버스기사가 이제 출발해야한다 그래서 연락처를 받고 내렸다. 하지만 문제는 더 커졌다. 백팩을 찾느라 버스 부트 안에 있던 큰 가방을 잠시 잊어버렸다. 내가 잠시 버스에 내렸을 때 내 큰 가방이 밖에 꺼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백팩을 찾으러 버스 안에서 헤맸는데..밖에서는 가방 주인이 없자 다시 부트 안에 가방을 넣었다. 나는 마을주민들이 멤버들의 가방을 들어주길래 내 가방도 당연히 챙긴 줄 알았다. 저녁이 되서야 가방을 푸르려고 찾으려는데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팀리더가 아까 받은 버스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행이 큰 가방은 부트안에 있다고 내일 오후에 버스가 나이로비로 가는 길에 마을에 들려 가방을 내려준다고 하였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의 희망을 붙들고 첫 날밤은 씻지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큰 가방은 돌려받았다. 이러한 사건 때문에 나는 첫날부터 캠프에 100% 집중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주위 사람들의 격려(?)때문에 하루하루 기다렸지만 캠프 끝날 때 까지 소식은 없었다.
몇 일이 지나서야 마음을 추스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참여했다. 이번 케냐워크켐프에 우리는 염소 밥주기, 염소우리 청소, 시장 청소, 나무 심기 그리고 문제의 '지거캠패인'이였다. 지거 캠패인 이외에는 우리에게 큰 문제는 아니였다. 하지만 지거 캠패인때문에 저녁 미팅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겼다. 지거(jigger)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마을에서 설명해주기를 전염성이 있는 생물체로 주로 아이들의 손발에 파고들어 살 속에서 알을 까면서 몸에 번식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전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거부감이 들었다. 또한 아무런 사전교육없이 블레이드 칼을 주며 지거를 제거하라고 하니 당황했다. 하지만 내가 왜 이 곳 케냐에 왔는가 생각해보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점차 발톱도 깎여주고 레드크로스에서 나온 전문가들한테 지거를 제거하는 방법을 물어보면서 지거도 제거하려도 노력하였다. 하지만 여러번 해봤지만 아이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해서 차마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하는 것을 옆에서 배우면서 아이들을 옆에서 잡아주면서 안정시켜주었다.
주중에는 이렇게 일을 하고 주말에는 키슈무로 나와서 휴식을 취했다. 첫째 주에는 우리는 키슈무 레지던스에 머물면서 마사이마켓을 가서 기념품을을 샀다. 둘째 째 주에는 키슈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다른 캠프팀들과 머물면서 시내를 구경하였다. 주말에 다른 팀과 만나면서 도중에 그 팀에서 생긴 안좋은 소식들 엉겹결에 알게 되어서 몇일 동안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키슈무 레지던스에서 침대가 하나 부족하다고 한국인동생과 나에게 침대를 같이 쓰라고 해서 같이 썼다. 하지만 다음 날 방 값을 계산을 할 때 당연히 침대를 하나만 썼으니 한 명의 방 값을 내겠다고 했지만 레지던스 측에서는 사람 수로 계산을 해야하니 두명의 값만 내라고 하였다. 나와 동생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여 주위에 다른 멤버들이 우리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주인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여 한명치만 돈을 냈다. 그리고 3주가 지났다. 23일 클로징 세레모니를 마지막으로 나와 한국인 동생 둘이 저녁6시에 심야버스를 타고 12시간이 지나 새벽 6시에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에 팀리더가 심야버스는 안전하지 못하고 새벽에 나이로비에 도착하면 위험하니깐 다음 날 아침에 가라고 설득했지만 우리는 24일에 야택에 있는 한국인 오빠와 셋이 사파리를 가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떠났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이 캠프 내내 일어나서 너무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사고는 일어났기 때문에 한시라도 긴장을 가지고 지냈다. 하지만 이러한 힘들었던 일도 나중에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나에게 케냐는 애증의 나라이다. 당근과 채찍을 다 배우고 한국에 돌아왔다. 내 삶에 잊지 못할 그러한 경험이라고 확신하면서 매일 밤 케냐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내며 한국 생활에 다시 적응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케냐에 있을 때 마냥 힘들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그 곳이 그리워진다.
몇 일이 지나서야 마음을 추스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참여했다. 이번 케냐워크켐프에 우리는 염소 밥주기, 염소우리 청소, 시장 청소, 나무 심기 그리고 문제의 '지거캠패인'이였다. 지거 캠패인 이외에는 우리에게 큰 문제는 아니였다. 하지만 지거 캠패인때문에 저녁 미팅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겼다. 지거(jigger)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마을에서 설명해주기를 전염성이 있는 생물체로 주로 아이들의 손발에 파고들어 살 속에서 알을 까면서 몸에 번식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전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거부감이 들었다. 또한 아무런 사전교육없이 블레이드 칼을 주며 지거를 제거하라고 하니 당황했다. 하지만 내가 왜 이 곳 케냐에 왔는가 생각해보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점차 발톱도 깎여주고 레드크로스에서 나온 전문가들한테 지거를 제거하는 방법을 물어보면서 지거도 제거하려도 노력하였다. 하지만 여러번 해봤지만 아이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해서 차마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하는 것을 옆에서 배우면서 아이들을 옆에서 잡아주면서 안정시켜주었다.
주중에는 이렇게 일을 하고 주말에는 키슈무로 나와서 휴식을 취했다. 첫째 주에는 우리는 키슈무 레지던스에 머물면서 마사이마켓을 가서 기념품을을 샀다. 둘째 째 주에는 키슈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다른 캠프팀들과 머물면서 시내를 구경하였다. 주말에 다른 팀과 만나면서 도중에 그 팀에서 생긴 안좋은 소식들 엉겹결에 알게 되어서 몇일 동안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키슈무 레지던스에서 침대가 하나 부족하다고 한국인동생과 나에게 침대를 같이 쓰라고 해서 같이 썼다. 하지만 다음 날 방 값을 계산을 할 때 당연히 침대를 하나만 썼으니 한 명의 방 값을 내겠다고 했지만 레지던스 측에서는 사람 수로 계산을 해야하니 두명의 값만 내라고 하였다. 나와 동생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여 주위에 다른 멤버들이 우리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주인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여 한명치만 돈을 냈다. 그리고 3주가 지났다. 23일 클로징 세레모니를 마지막으로 나와 한국인 동생 둘이 저녁6시에 심야버스를 타고 12시간이 지나 새벽 6시에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에 팀리더가 심야버스는 안전하지 못하고 새벽에 나이로비에 도착하면 위험하니깐 다음 날 아침에 가라고 설득했지만 우리는 24일에 야택에 있는 한국인 오빠와 셋이 사파리를 가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떠났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이 캠프 내내 일어나서 너무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사고는 일어났기 때문에 한시라도 긴장을 가지고 지냈다. 하지만 이러한 힘들었던 일도 나중에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나에게 케냐는 애증의 나라이다. 당근과 채찍을 다 배우고 한국에 돌아왔다. 내 삶에 잊지 못할 그러한 경험이라고 확신하면서 매일 밤 케냐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내며 한국 생활에 다시 적응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케냐에 있을 때 마냥 힘들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그 곳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