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모로코, 환상에서 현실로 마주한 성장
Nador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사실 모로코에 도착하기 전 까지 나는 단지 모로코에 대한 막연한 환상만이 있었다. 그 것 보다 만일 워크캠프를 참여하지 않았다면 내가 정말 아프리카로 간다는 것 자체를 생각도 못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 교육 방침이 학원 다니는 돈을 아껴서 여행을 보내주시는 거였다. 그래서 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을 했었고 고등학교 때는 해외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름 해외 문화권에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해외에 거주하는 것을 늘 당연시 여겨왔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만큼은 막연하게 생각하며 내가 갈 수 있을 꺼 라는 기회조차도 생각 하지 않은 채 지나왔다. 처음에 워크캠프 신청서를 쓰려고 했을 때는 내가 가보고 싶었던 오스트리아나 체코 같은 동유럽 국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요번 같은 워크캠프에 참가하였던 동기인 박종진군이 이왕 워크캠프로 해외 나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중에 언제라도 갈 수 있을만한 그런 국가가 아닌 쫌 색다르고 기억에 남을만한 막상 여행을 가게 된다면 꺼려지는 나라를 가자고 제안을 했었다. 몇일을 고심 끝에 모로코를 선택하고 모로코에 대해 사전조사를 했을 때 영화로 유명해진 “카사블랑카”를 가보고 싶다고 느꼈고 아프리카 중에서 거의 제일 잘사는 나라로써 나에게 인식이 되어왔다. 사실 아프리카 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위험’ 이었었고 그 당시 리비아 반군과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모로코 만큼은 유럽에서 특히 스페인에서 가깝기 때문에 아프리카라고 하기 보다는 유럽에 가까운 나라이며 치안시설이 정말 잘 되어 있다고 인터넷에서 보았기 때문에 걱정보다는 기대감으로 모로코 가기 전 까지 하루하루를 D-Day 까지 새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과 사람들 중 모로코 가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6명이였고 다 같은 날짜에 카사블랑카 행 비행기를 탔으며 같이 워크캠프를 참가하기 전 까지 카사블랑카에 머무르며 여행하기로 하였다. 나와 박종진이라는 친구 빼고는 전부 모로코 다른 지역에서 워크캠프를 참가하였기 때문에 카사블랑카 여행 이후 헤어지기로 하였다. 7월4일에 워크캠프를 시작하였지만 6월30일 출발 비행기와 7월1일부터 출발하는 비행기의 가격차이가 50만원이상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워크캠프 날짜보다 빨리 도착했던 편이였다. 두바이 경유 비행기를 타고 대략 23시간쯤 지나서야 모로코에 도착하였다. 나는 어느 영화에 나왔던 모습 처럼 카사블랑카 라는 도시에 기대가 컸었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사블랑카’라는 영화 때문에 카사블랑카는 알아도 모로코는 모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있었고 또 사전에 조사하기로는 카사블랑카의 날씨가 정말 좋고 유럽풍의 아름다운 도시라고 알았기 때문 이였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탓 이였을까, 내가 생각하던 도시와는 정 반대였다. 많은 실망감을 하였다. 내가 생각 하기로는 모로코는 아직 국민들 의식이 너무 저급하였다. 아프리카 나라 중에 부유한 나라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했었지만 중앙선도 없고 일차선 도로에서 택시기사가 뒤에 있는 차들 생각도 안하고 몇 분 동안 멈춰서 자기자신 볼일이나 하며 새치기는 문화라고 생각 할 정도로 많이 한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편견과 차별이 난무하며 자기가 생각 하는 것은 옮은 것과 상관없이 믿고 행한다. 카사블랑카는 큰 도시이고 많이 번화 되었던 도시인데 이 도시에서 마져 이런 시민의식을 보여 준 것 에 대해서 많이 실망하였다. 아직은 무엇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기에는 자신들이 살아갈 삶이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모로코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시민의식은 아주 높은 것이라 생각했고 그 나라의 경제규모와 부유한 정도가 정말 국민들 의식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자기 자신 하나 책임도 못 진다면 누굴 배려할 여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많이 실망을 하고 카사블랑카에서 Nador 라는 도시로 떠났다 기차를 타고. 동양계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지 어디 가든지 항상 모로코인 들에게 주목을 끌었고. 나와 내 친구들은 그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와 종진이는 1등석을 타고 워크캠프 참여할 지방까지 갔다. 무려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차를 타며 도착했고 Nador 역에서 내려서 보았던 새벽 햇살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난 지금도 그때를 기억한다. 정말 기나긴 여정 끝에 우리는 워크캠프 지역에 도착하였다. 워크캠프라는 것을 단순히 수련회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갔었다. 고된 일을 하게 될 꺼 라 고는 대충 생각 하였으나 숙식 숙박은 기본으로 제공될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가 워크캠프에서 본 것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조건이 였다. 정말 냄새나던 단칸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 수세식 화장실 수세식 변기 옆에 조그만하게 있었던 수도꼭지로 물을 받아 샤워를 하라고 처음 워크캠프장 가서 리더한테 들었을 때는 뭐 이런데가 다 있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곳도 정말 시멘트 바닥에서 잤으며 자고 있는 동안 배게에서 도마뱀 한마리가 나와 잠을 깨게 만들었으며 날개미들이 너무 많아 자고있는동안 너무 불편했다. 참가자들도 많은 인원이 모로코인 이였다. 리더가 그 지역 주민이여서 리더의 친구들을 많이 워크캠프장에 초대 하였는데 그럴 때 마다 모로코인 들이 더 많아져 뭔가 소외된 느낌도 들었다. 처음에 분명이 공용어가 영어라고 들었는데 만난지 몇초가 안되서 아랍어가 공용어가 되었고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기본적인 단어 조차도 몰랐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고 막막함 그 자체였다. 처음 만나고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그 다음날 이른 아침에 기상을 하여서 일을 시작 하기 위해 팀을 나누고 일을 나눴다. 우리 워크캠프장의 일은 학교에서 정원을 꾸미는 것이였는데, 말이 정원을 꾸미는거지 막노동 삽질 이였다. 그 중에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 강력한 햇빛 이였다. 정말 12시가 되서 일을 할 때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좋았던 것은 모로코인들 스페인 참가자 그리고 체코참가자 모든 참가자들이 하나가 되려고 노력을 하였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도 하였다. 영어는 못하지만 최대한 하려고 노력을 하였고 언어는 통하진 않지만 마음은 통하고 있었다. 일은 아침 10시부터 2시까지 하였는데 점심을 3~4시에 먹고 5시부터는 항상 after activity를 하였다. 첫 날에는 Nador의 역사를 경험하러 유적지에도 갔었고 주민들이 사는 집에 직접가서 생활 문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모로코에서 유명한 바다를 4번정도 놀러가기도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싸우나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모로코인 친구중 Farid라는 친구가 ‘best friend’를 연속으로 외치며 나와 종진이의 때를 밀어주고 전신 마사지를 해주었다. 카사블랑카에서 보았던 거와는 다른 친절함에 놀랐으며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정말 잘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남자여서 그런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모로코는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에 대한 차별이 조금은 존재하는 것 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언어적으로 행동적으로 성희롱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언어적으로 신체 부위를 언급하며 농담할 때는 이런 것이 이 곳의 농담인가? 이런 생각으로 그냥 하나의 문화로 생각하였는데 점점 갈수록 수위가 높아졌다. 리더도 똑같이 그랫었기 때문에 그냥 하나의 이나라 사람들만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라며 애써 외면해 왔지만은 한국 사람들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여서 뭔가 정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여자가 모로코를 간다며 적극적으로 막고 싶다. 하지만 그런 것 빼고는 별로 걱정거리가 없기 때문에 남자들은 오히려 모로코인들이 베푸는 친절함에 좋아할 것 만 같다. 7월 18일이 되었을 때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생전 처음 했던 이들이 고되고 힘들어서 그런지 기뻤다. 힘들었던 워크캠프가 끝났다. 난 아직도 기억한다 Nador역 에서 새벽 햇살을 맞으며 종진이와 도착했을 때를 처음에 워크캠프 장에 갔을땐 이런곳이 다 있나 했다. 실제로 힘들었다 사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난 힘들다 그렇치만 실제로 헤어지려하니 언제나 그랬던 만남과 헤어짐과 마찬가지로 시원섭섭 했다. 정들었나보다 워크캠프가 힘들었지만 힘들었던 만큼 내가 성숙해진 것이라고 난 믿는다. 이제까지 이 만큼의 고생이 나에게는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