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프랑스, 낯선 불어와 설렘의 시작

작성자 이수정
프랑스 CONC 012 · ENVI 2012. 08 프랑스

Gere Belestem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드디어 비행기가 샤를 드골 공항에 착륙하고, 객실 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시야에 쏟아져 들어오는 낯선 불어들에 비로소 프랑스에 왔음을 깨달았다. 낯선 장소에서 쓸 수 있는 언어라고는 영어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맑게 개어있었다. 물론 과연 내가 프랑스에서 무사히 3주를 보낼 수 있을까하는 실낱같은 걱정이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하면 가게 될 워크캠프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다.

나는 여태껏 워크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교에서 제공해준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내가 워크캠프라는 것에 참여해 볼 계기조차 전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유학을 갈 계획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영어 공부조차 한국 땅을 벗어나서 해본 적이 없는 토박이였기 때문에 유럽은 내게 환상의 세계와도 같았다. 그것도 프랑스라니!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바로 그 나라에 내가 갈 수 있다니! 물론 봉사활동을 할 시골 마을로 가야했기에 파리를 제대로 둘러볼 짬조차 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토록 상상만 해오던 곳에 있노라니 기차 유리창을 통해 보는 풍경조차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게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외국인과 대화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내가, 3주 동안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과연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을까. 약속 장소인 기차역까지는 파리 몽파르나스 역으로부터 6시간 남짓. 기차가 역으로 한달음씩 달려갈 때마다 내 심장은 더욱 크게 뛰었다.

안내방송이 불어로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워낙 정시성이 뛰어난 기차이기에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했으므로 역을 헷갈릴 염려조차 없었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할 걱정이 사라지자 갑자기 밀려드는 새로운 걱정. 과연 사람들은 어떨까? 비단 머리색과 눈 색이 다르다는 이질감 때문에 드는 걱정이 아니었다. 물론 내 스스로 여러 사람들에게 맞추고자 노력해야지만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음을 잘 알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호흡이 맞아야 하지 않는가. 성격 차이는 좁히기 힘들다. 일에 대한 걱정보다도 내겐 자칫 인간관계에서 올 마찰과 갈등이 더욱 더 골치 아픈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하니까.

결국 기차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플랫폼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저만치 나처럼 배낭을 맨 채 서 있는 사람들 몇 명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소극적인 내 성격도 던져버리고 붙임성 좋게 행동하도록 노력해야지. 한껏 웃어 보이며 인사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런, 시작부터 삐끗하고 말았다. 알렉스라는 리더가 차로 우리들을 데리려 왔는데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자연스럽게 볼을 부비며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차례가 오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다행히 알렉스가 붙임성 좋게 면도를 하고 올 걸 잘못했다고 농담을 던져줌으로써 어색한 순간은 유야무야 잘 넘어 갔다. 조금은 미안하면서도 매우 고마웠다. 아직까지는 다들 서먹하지만 꽤나 좋은 사람들을 만났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삐끗할 뻔했지만 도리어 시작이 매우 좋았다.

내가 간 마을의 이름은 Gere Belesten이었는데, 정말 시골 마을답게 아담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도 주변의 산들과 들판이 어우러진 경치는 정말 일품이었다. 특히 캠프장 주변에는 냇가까지 있어 금상첨화였다. 어디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엽서 사진 같은 장면이 나올 정도였으니. 마을도 참 마음에 들었는데, 사람들조차 너무나 좋았다. 우리 워크캠프 사람들은 총 18명이었다. 두 명의 프랑스 리더, 실비앙과 알렉스, 한 명의 폴란드 리더 마르친, 프랑스인인 클레모스와 졸렌, 폴란드에서 온 록산나와 마그다 그리고 필립, 터키에서 온 에페와 에스기, 러시아에서 온 사샤(이래봬도 남자애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보바, 한국인으로는 나와 같은 학교 오빠(동양인으로서는 우리가 유일했다!), 스페인에서 온 파울라와 니우스, 하비엘, 영국에서 온 사라.

우리 모두는 놀랍게도 온 지 며칠 만에 서로 너무나 친해졌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계속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로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많았고, 얘기해주고 싶어해 하는 것도 많아 이야기는 넘쳐났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들도 달라 주제 또한 다양했다. 성격 또한 천차만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다들 죽이 참 잘 맞았다.

약간은 까칠하고 도도해 보이지만 성실한 리더였던 실비앙, 리더임에도 불구하고 열아홉살이라고 말해 날 깜짝 놀라게 했지만(수염도 그렇고, 열아홉살이라기엔 너무 어른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과 문화, 술게임까지 좋아하고, 또 은근 이따금씩 아이같이 구는 게 귀여웠던 알렉스, 든든하면서도 은근 유머가 뛰어나 분위기 메이커였던 마르친, 말수는 적었지만 우아하고 단아했던 미녀 클레모스, 귀여우면서도 붙임성 좋고 다정한 졸렌, 개구지면서도 끼가 많은 록산나와 마그다, 촐싹대는 개구쟁이 노릇을 도맡아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필립(더군다나 워크캠프를 여러 번 갔다 와 본 고참자였다!), 은근 던지는 농담으로 빵 터지게 만드는 사샤(거기다 이공계라니! 러시아 군무기 제작 아이디어를 자기가 내기도 했다는 데,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정다감하면서도 순수한 보바, 내 절친을 쏙 빼닯은 파울라와 니우스(성격을 쏙 빼닮아 도플갱어를 보는 듯 했다!), 착하고 정 많은 에페, 역시 과묵하지만 든든하게 뒤에서 챙겨주는 에스기, 맏언니처럼 든든했던 사라(이상적인 영국인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지적인데다 마음씨까지 좋다니! 프랑스어 선생님이라 불어에도 매우 뛰어났다.)……. 어느 새 모두들 다 내 소중한 친구들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일은 매우 고되었다. 차로 일터까지 1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던 인포싯과는 달리, 우리가 일해야 하는 곳은 한 시간 동안 등산을 해야 했으며, 여러 나무들과 가시덤불로 우거진 산길을 깔끔이 정리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막노동일과 다름없었다. 따가운 볕에 까맣게 타다 못해 벌겋게 달아오른 데다 가시와 잔가지에 이리저리 긁혀 피부는 말이 아니었다. 모기와 말파리까지 극성을 부려 몸에는 늘 벌레 물린 자국으로 가득해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흐르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매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고작 3주라는 시간인데 어쩜 이렇게 친해져 버렸는지. 캠프 기간이 끝나갈 즈음에는 정을 너무 많이 주어버린 게 아닌가 조금은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나, 서로 너무나 죽이 잘 맞았다면 잘 맞았다는 게 탈이었던 것을. 떠나는 날, 내 소중한 친구들에게 북 키홀더를 선물로 나눠주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상하게도 그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기차 안에 자리를 잡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모두들 안녕히.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너희들도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얼굴을 직접 보긴 힘들겠지만, 우리에겐 소셜 네트워크가 있잖아! 아, 고마운 워크캠프! 워크캠프는 내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준 은인과 다름없다. 이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