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졸업 전, 독일 시골마을에서 인생 경험
Castle "Dreiluetzow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2년 전 떠났던 유럽여행의 추억을 잊지 못한 채 대학생활을 하던 중 워크캠프를 알게 되었다. 4학년 졸업을 앞두고 학생 신분일 적에 다시 한번 해외로 떠나고 싶었다. 다만 이번에는 여행만이 목적이 아닌 뭔가 가치있는 경험을 하고 싶었고, 여행만으로는 겪을 수 없는 전혀 색다른 경험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사실 졸업반으로서 워크캠프보다는 영어공부나 자격증 등을 준비하는 것이 더 필요했던 시기였지만, 호기심 앞에 장사 있으랴! 호기심과 경험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결국은 워크캠프에 지원서를 넣게 만들었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영어공부를 하며 기다렸다.
현지 활동 및 특별했던 에피소드
합격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준비해서 떠나게 되었다. 내가 봉사활동을 했던 곳은 독일의 시골마을 드라일륏쪼. 대도시로는 함부르크에서 가깝고 작은 도시로는 슈베린과 가까운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주말 함부르크에 도착해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곧장 드라일륏쪼로 찾아갔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제법 갈아타서야 미팅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내가 첫번째였다. 버스정류장에서 도미닉이라는 캠프리더?를 만나고 먼저 숙소로 들어왔다. 우리는 Schloss Dreiluetzow에 딸린 작은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방에 누워 기다리고 있으니 그 한나절간 캠퍼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내가 도착한건 낮 1시경, 밤 10시가 다 되어서도 계속 캠퍼들이 왔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대만, 벨라루스, 세르비아, 멕시코, 터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캠퍼들이 모두 모였다. 이중에서 대부분은 친구, 연인이 함께 온 경우여서 신기했다.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국어로 이야기 할 친구가 있었고, 멕시칸과 이탈리안 친구 또한 어느정도 말의 뿌리가 비슷해서 그런지 그들의 언어로 다른 캠퍼들과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하나뿐인 한국인이어서 조금은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 너무너무 한국말이 하고 싶고 듣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이것은 첫 주를 보낸 휴일, 함부르크 시내에 나갔을 때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 담소를 나눈 것으로 해소되었다! 한국사람이 어찌나 반갑던지.)
캠퍼들 대부분은 유럽인이었고 아시안은 대만에서 온 두 친구와 나뿐이었다. 독일인 캠프리더 루이자와 대만인 친구와 나는 같은 방을 썼고 대만친구들은 한류의 영향인지 종종 내가 한국말이 그립다고 할 때엔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갑게 대해주곤 했다.
숙소는 깨끗했다. 시골이고 숲이 주변에 있어서 그런지 벌레가 다소 많았던 것이 유일한 흠. 손바닥만한 거미가 종종 방으로 들어와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층 침대에서 지내며 정해진 파트너와 같이 밥 준비,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청소 등을 함께 했는데 같은 짝이었던 데니스가 일을 너무 안해서 한번은 "너 자꾸 청소 안하고 놀러다닐래?"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했다. 물론 웃으며 장난스레 했지만 마음속으론 정말 꿀밤먹이고 싶었다. 음식은 드라일륏쪼 성 안의 부엌에서 공수되었고 종종 우리가 요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음식은 빵, 햄, 치즈, 샐러드, 홍차, 커피, 우유 등 맛있었지만 매일 같은 메뉴를 매일 먹으니 다들 변비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 돌아올 때 나는 엄청 살이 쪄서 돌아왔다...
아침 식사 후에는 그 마을에서 있을 촛불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을 했다. 풍선에 풀 먹인 종이를 얇게 붙여 등불을 만들고, 더러운 유리병을 씻어 양초 홀더를 만들었다. 이때 바퀴벌레, 쥐, 지렁이, 개구리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첫번째 작업이었는데 아무래도 모두 도시에서 온 친구들이라 그런지 질색팔색을 했다. 때로는 무겁고 거대한 나무들로 사다리를 만들기도 하고 텐트를 설치하기도 했다. 미술을 전공했던 나에게 가장 즐거웠던 일은 철판에 그림을 그리고 오려내어 거울을 붙이는 것이었다. 전부 축제때 드라일륏쪼 성 주변의 숲을 축제 분위기가 나게 꾸미기 위한 것들이었는데 쉬운 듯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모두들 일을 마치고 난 저녁에는 묵묵히 밥을 마셨다. 우리는 약 2주간 축제를 준비하고 워크캠프의 마지막 날, 하루동안 열리는 축제를 위해 열심히 작업했다. 축제때 어떠한 부스를 설치할 지 회의하고 부스를 정했다. 우리가 기획한 어트랙션은 다양했다. 드라일륏쪼 성에 사는 유령인 디타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고(독일어를 할 줄 아는 몇 유럽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유령 디타에게 묻고싶은 것을 물어보는 부스도 있었다. 그곳에서 캠퍼들은 테이블 밑에 숨어 디타인 척 대답을 해주곤 했다. 정말 여러 부스가 있었지만 유난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대만 친구들이 중국어로 축제 방문객들의 이름을 적어주는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한글로 독일인들의 이름을 받아적어 주고 있었다. Lily라던지 Axelbeier같은 이름이 릴리, 악셀바이어로 바뀌는 것이 그들에겐 몹시 흥미로웠던 것 같다. 방문객들은 나에게 그냥 장난으로 아무거나 그려서 주는 건 아니냐고 물었고 나는 L이 ㄹ이다~ 하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외국인이 한글을 신기해 하며 관심 가지는 것이 즐거웠다.
축제를 마치고 우리는 뒷정리까지 끝낸 후 바베큐파티를 했다. 워낙 작업도 두세명정도가 그룹지어 하게 되었었고, 친구들끼리 온 데다가 방도 한 방에서 다같이 자는 게 아니어서 모두가 두루두루 끈끈한 동료애같은 걸 가진 것은 아니었었다. 휴일에 같이 인근 도시에 가서 관광을 할 때에도 두서너명씩 떨어져 다니곤 했다. 사실 마지막날 까지도 어색한 친구들도 있었다. 정말 모두가 흔히 말하는 '요즘 애들' 같고, 모두 자기 나라에서는 컴퓨터게임 열심히 하다 엄마에게 등짝맞고 공부하는 그런 느낌의 아이들같았다. 숫기 없고 수줍음 많은... 그렇지만 매일 밤 같이 약간의 술을 마시며 혹은 악기를 연주하며 대화를 나눌 때 시끌시끌 웅성웅성한 이야기 대신 깊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진로에 대한 개인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그당시 화제였던 그리스발 금융위기와 동북아시아 국민들간의 서로에 대한 생각? 등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여기 모인 우리들은 제법 비슷한 고민을 안고 비슷한 생활 풍경 안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대만, 벨라루스, 세르비아, 멕시코, 터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캠퍼들이 모두 모였다. 이중에서 대부분은 친구, 연인이 함께 온 경우여서 신기했다.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국어로 이야기 할 친구가 있었고, 멕시칸과 이탈리안 친구 또한 어느정도 말의 뿌리가 비슷해서 그런지 그들의 언어로 다른 캠퍼들과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하나뿐인 한국인이어서 조금은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 너무너무 한국말이 하고 싶고 듣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이것은 첫 주를 보낸 휴일, 함부르크 시내에 나갔을 때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 담소를 나눈 것으로 해소되었다! 한국사람이 어찌나 반갑던지.)
캠퍼들 대부분은 유럽인이었고 아시안은 대만에서 온 두 친구와 나뿐이었다. 독일인 캠프리더 루이자와 대만인 친구와 나는 같은 방을 썼고 대만친구들은 한류의 영향인지 종종 내가 한국말이 그립다고 할 때엔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갑게 대해주곤 했다.
숙소는 깨끗했다. 시골이고 숲이 주변에 있어서 그런지 벌레가 다소 많았던 것이 유일한 흠. 손바닥만한 거미가 종종 방으로 들어와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층 침대에서 지내며 정해진 파트너와 같이 밥 준비,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청소 등을 함께 했는데 같은 짝이었던 데니스가 일을 너무 안해서 한번은 "너 자꾸 청소 안하고 놀러다닐래?"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했다. 물론 웃으며 장난스레 했지만 마음속으론 정말 꿀밤먹이고 싶었다. 음식은 드라일륏쪼 성 안의 부엌에서 공수되었고 종종 우리가 요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음식은 빵, 햄, 치즈, 샐러드, 홍차, 커피, 우유 등 맛있었지만 매일 같은 메뉴를 매일 먹으니 다들 변비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 돌아올 때 나는 엄청 살이 쪄서 돌아왔다...
아침 식사 후에는 그 마을에서 있을 촛불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을 했다. 풍선에 풀 먹인 종이를 얇게 붙여 등불을 만들고, 더러운 유리병을 씻어 양초 홀더를 만들었다. 이때 바퀴벌레, 쥐, 지렁이, 개구리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첫번째 작업이었는데 아무래도 모두 도시에서 온 친구들이라 그런지 질색팔색을 했다. 때로는 무겁고 거대한 나무들로 사다리를 만들기도 하고 텐트를 설치하기도 했다. 미술을 전공했던 나에게 가장 즐거웠던 일은 철판에 그림을 그리고 오려내어 거울을 붙이는 것이었다. 전부 축제때 드라일륏쪼 성 주변의 숲을 축제 분위기가 나게 꾸미기 위한 것들이었는데 쉬운 듯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모두들 일을 마치고 난 저녁에는 묵묵히 밥을 마셨다. 우리는 약 2주간 축제를 준비하고 워크캠프의 마지막 날, 하루동안 열리는 축제를 위해 열심히 작업했다. 축제때 어떠한 부스를 설치할 지 회의하고 부스를 정했다. 우리가 기획한 어트랙션은 다양했다. 드라일륏쪼 성에 사는 유령인 디타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고(독일어를 할 줄 아는 몇 유럽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유령 디타에게 묻고싶은 것을 물어보는 부스도 있었다. 그곳에서 캠퍼들은 테이블 밑에 숨어 디타인 척 대답을 해주곤 했다. 정말 여러 부스가 있었지만 유난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대만 친구들이 중국어로 축제 방문객들의 이름을 적어주는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한글로 독일인들의 이름을 받아적어 주고 있었다. Lily라던지 Axelbeier같은 이름이 릴리, 악셀바이어로 바뀌는 것이 그들에겐 몹시 흥미로웠던 것 같다. 방문객들은 나에게 그냥 장난으로 아무거나 그려서 주는 건 아니냐고 물었고 나는 L이 ㄹ이다~ 하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외국인이 한글을 신기해 하며 관심 가지는 것이 즐거웠다.
축제를 마치고 우리는 뒷정리까지 끝낸 후 바베큐파티를 했다. 워낙 작업도 두세명정도가 그룹지어 하게 되었었고, 친구들끼리 온 데다가 방도 한 방에서 다같이 자는 게 아니어서 모두가 두루두루 끈끈한 동료애같은 걸 가진 것은 아니었었다. 휴일에 같이 인근 도시에 가서 관광을 할 때에도 두서너명씩 떨어져 다니곤 했다. 사실 마지막날 까지도 어색한 친구들도 있었다. 정말 모두가 흔히 말하는 '요즘 애들' 같고, 모두 자기 나라에서는 컴퓨터게임 열심히 하다 엄마에게 등짝맞고 공부하는 그런 느낌의 아이들같았다. 숫기 없고 수줍음 많은... 그렇지만 매일 밤 같이 약간의 술을 마시며 혹은 악기를 연주하며 대화를 나눌 때 시끌시끌 웅성웅성한 이야기 대신 깊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진로에 대한 개인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그당시 화제였던 그리스발 금융위기와 동북아시아 국민들간의 서로에 대한 생각? 등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여기 모인 우리들은 제법 비슷한 고민을 안고 비슷한 생활 풍경 안에서 살고있다는 것이다.
참가 후 변화와 느낀 점,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 하루가 특별했다.
방 안에 커다란 거미가 나와 모두를 잠못들게 하고 잡는다고 난리 난리를 쳤던 밤이나 휴일날 바닷가에서 나무가지에 빵반죽을 꽂아 구워먹었던 것들, 그 날 봤던 바다의 풍경, 다른 곳보다 낮은 기온의 드라일륏쪼에서 감기에 심하게 걸려 병원에 실려가야 했던 한 캠퍼나, 모두들 끝물에는 약을 돌려먹어가며 쿨쩍거리며 작업에 임했던 날들, 일 중간중간에 마시던 밀크티.. 한 세르비아 남자아이는 영어를 유난히 잘해서 나를 종종 길고 빠른 영문장으로 넉다운 시킨 적이 있는데 한번은 한국과 북한은 왜 갈라서게 됐는지, 서울의 인구는 몇인지 네가 사는 동네의 인구는 몇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당황해서 답변을 제대로 못했는데 그 아이는 내 대답에 만족못했는지 그 이후로 질문을 안 하더니 한국의 축구선수 리충수를 아냐고 물었다. 리충수가 누구야... 모른다고 했는데도 이삼일을 꼬박 물어서 스펠링을 물어보니 이천수더라. 그런 사소한 것들도 추억이 되어서 기억에 남는다.
아! 멕시칸 남자애와 프랑스 여자애는 그곳에서 커플이 되었다.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이 워크캠프를 위해 졸업반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뒤로 하고 떠났기 때문에 독일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학교로 복학해야 했고 일년간 졸업과 졸업전시, 대학원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야 했다.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방학, 분명 다른 일을 했었다면 마지막 학기가 조금은 더 여유로웠을 것을 안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는 값진 경험이었다. 보다 일찍 워크캠프를 알았더라면 두어번은 더 다녀왔을 것을!
이번 달 말, 워크캠프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간다. 모두를 다시 만나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에서, 세르비아에서 그리고 나도 한국에서 바르셀로나로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떠난다.
우리가 워크캠프를 통해 얻은 것은 봉사활동을 통한 보람 뿐이 아니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 다르다는 것은 때로는 벽을 만든다. 다르다는 인식이 우리를 외롭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문화권 다른 언어 다른 풍경을 가지고 살아온 젊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름을 장애물로 인식하지 않은 채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대화하고 섞인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경험을 준다. 이 경험은 내 안에 한 블럭 더 쌓였고, 내가 앞으로 또 하나의 낯선 상황에서 '다름'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캠퍼들이 서로서로 끈끈하게 유대하지 않았어도 벽이 없었다. 서로 다르다 말하며 벽을 만들지 않았다. 벽이 없는 공간에서는 말이 없어도 외롭지 않다. 나는 이곳에서 모국에 대한 애착은 더 커졌지만 외로움은 느끼지 않았다.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자 경험이었다.
방 안에 커다란 거미가 나와 모두를 잠못들게 하고 잡는다고 난리 난리를 쳤던 밤이나 휴일날 바닷가에서 나무가지에 빵반죽을 꽂아 구워먹었던 것들, 그 날 봤던 바다의 풍경, 다른 곳보다 낮은 기온의 드라일륏쪼에서 감기에 심하게 걸려 병원에 실려가야 했던 한 캠퍼나, 모두들 끝물에는 약을 돌려먹어가며 쿨쩍거리며 작업에 임했던 날들, 일 중간중간에 마시던 밀크티.. 한 세르비아 남자아이는 영어를 유난히 잘해서 나를 종종 길고 빠른 영문장으로 넉다운 시킨 적이 있는데 한번은 한국과 북한은 왜 갈라서게 됐는지, 서울의 인구는 몇인지 네가 사는 동네의 인구는 몇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당황해서 답변을 제대로 못했는데 그 아이는 내 대답에 만족못했는지 그 이후로 질문을 안 하더니 한국의 축구선수 리충수를 아냐고 물었다. 리충수가 누구야... 모른다고 했는데도 이삼일을 꼬박 물어서 스펠링을 물어보니 이천수더라. 그런 사소한 것들도 추억이 되어서 기억에 남는다.
아! 멕시칸 남자애와 프랑스 여자애는 그곳에서 커플이 되었다.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이 워크캠프를 위해 졸업반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뒤로 하고 떠났기 때문에 독일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학교로 복학해야 했고 일년간 졸업과 졸업전시, 대학원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야 했다.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방학, 분명 다른 일을 했었다면 마지막 학기가 조금은 더 여유로웠을 것을 안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는 값진 경험이었다. 보다 일찍 워크캠프를 알았더라면 두어번은 더 다녀왔을 것을!
이번 달 말, 워크캠프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간다. 모두를 다시 만나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에서, 세르비아에서 그리고 나도 한국에서 바르셀로나로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떠난다.
우리가 워크캠프를 통해 얻은 것은 봉사활동을 통한 보람 뿐이 아니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 다르다는 것은 때로는 벽을 만든다. 다르다는 인식이 우리를 외롭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문화권 다른 언어 다른 풍경을 가지고 살아온 젊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름을 장애물로 인식하지 않은 채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대화하고 섞인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경험을 준다. 이 경험은 내 안에 한 블럭 더 쌓였고, 내가 앞으로 또 하나의 낯선 상황에서 '다름'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캠퍼들이 서로서로 끈끈하게 유대하지 않았어도 벽이 없었다. 서로 다르다 말하며 벽을 만들지 않았다. 벽이 없는 공간에서는 말이 없어도 외롭지 않다. 나는 이곳에서 모국에 대한 애착은 더 커졌지만 외로움은 느끼지 않았다.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자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