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프랑스 남부, 잊지 못할 여름날의 자유
AJAL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나는 2013년 1월부터 4월 말까지 프랑스 릴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다.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름방학에는 유럽에 있는 동안 반드시 워크캠프에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교환학생을 프랑스에서 하니만큼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남부 지역에서 워크캠프를 하고 싶어서 처음에는 이탈리아 위주로 지원을 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불합격을 맞아서 새로운 방안을 찾아봐야 했는데, 이 때 다시 눈에 들어온 게 이 나라였다. 프랑스.
릴에서 보낸 4개월은 내게는 ‘유럽 생활 적응기’라고 해도 될 만큼 한국을 많이 그리워하기도 했고, 어딜 가더라도 집중되곤 하던 동양인을 향한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었다. 프랑스어로 소통이 되지 않는 나였고, 언어가 되지 않으니 그들과 친구가 되기 힘들다고 느꼈다. 그래서 프랑스 친구들을 사귀기보다는 다른 국적의 교환학생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고, 이에 이 4개월은 스스로 생각했을 때도, 썩 완벽한 적응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하루 빨리 프랑스를 벗어나 다른 국가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워크캠프 지역으로 다시 프랑스를 택한 것은 스스로도 꽤 놀라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시 프랑스를 택하게 된 이유는, 내 스스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던,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던 첫 프랑스 생활에서 배운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다시 프랑스 생활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택하게 된 워크캠프 프로그램은 ‘Sauveterre de rouergue'라는 프랑스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열리는 레게 뮤직 페스티발의 자원봉사자 일이었다.
릴은 벨기에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부의 도시라, 쌀쌀하고 흐린 날씨가 보통이었으나, Sauveterre는 스페인과 가까운 완연한 남부의 도시, 날씨는 맑고 북부 사람들과 다른 남부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다. 모든 조건이 다른 이 새로운 지역에서라면 나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또, 파티 문화를 즐기는 나였기에 무엇보다도 축제 분야에서 워크캠프를 하고 싶었고, 다른 워크캠프 프로그램과 달리 이 프로그램이 무려 한 달간의 ‘생활’이었던 점도 선택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첫 날, 파리에서 아침부터 시작한 기차 여행은 오후 5시나 되어서야 ‘Naucelle'이라는 작은 시골 역에서 끝을 맺었다. 리더는 프랑스인 Camille이었고, 다른 멤버들은 스페인 출신 Marta, Pol, 러시아 출신 Natalie, 우크라이나 출신 Sasha, 벨로루시 출신 Kristina, 터키 출신 Ali, Alper, 핀란드 출신 Emelie, 그리고 한국에서 온 세진과 나를 포함해서 총 인원은 11명이었다. 어색했던 첫 만남은 마을 사람들과 바비큐를 하면서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묻고, 출신지 등을 묻기 시작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캠프가 끝날 즈음엔, 우리 첫 만남 때 서로 어색했던 것 생각나냐면서 그 때는 이 캠프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고 얘기를 털어놓곤 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달은 크게는 네 시기로 구분 할 수 있었다. 홍보 및 마케팅 2주, 축제 소품 및 무대 설치 1주, 축제 당일 이틀, 축제 마무리 정리 1주일. 축제 홍보를 하곤 했던 첫 2주는 사실 일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하루에 2~3시간 씩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특히 이 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이 때가 캠프 기간 중 가장 여유로웠던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축제로 이동해서 우리의 축제를 홍보하곤 했었는데, 말했듯이 한 시간 씩 교대로 일을 하고나면 그 날의 임무는 모두 끝이라서, 밤 늦게까지 다른 축제를 즐길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함께 노래하고, 같이 춤추며 수많은 콘서트, 쇼 등을 관람했고, 그런 시간들이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기상도 11시였고, 차를 타고 홍보하러 나가는 것도 오후 2시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4일에 한 번씩은 프리데이였는데, 이 때는 마을에 있는 수영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바비큐 타임을 가지곤 했었다. 레게 뮤직 페스티발이라서 음악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레게’라는 장르는 처음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듣다보니 또 즐거워지곤 했었다. 매끼 식사는 조를 정해서 점심과 저녁을 만들곤 했는데,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 숙소 앞으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모이곤 해서, 우리는 매일매일 파티를 벌이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한편, 이렇게 즐거웠던 우리였지만, 여기에는 예상치 못했던 중도하차 인원이 생기기도 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늘 조용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던 한 친구가 캠프 생활 1주일도 안 되어 캠프를 떠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우리는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었고, 그는 그렇게 캠프를 떠났다. 캠프 2주하고도 반이 지났을 때는 또 한 명의 결원이 생겼는데, 그녀 역시 영어가 그렇게 능숙치 않아서, 그 탓에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차질이 있었다. 일련의 중도 하차 멤버들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어느 정도의 언어 능력은 물론 필수이지만, 언어가 능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입을 닫기 시작하면 커뮤니케이션의 기회의 문 또한 닫힌다는 것이다. 캠프에는 다양한 출신지의 멤버들이 있었고 저마다의 억양과 표현으로 영어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알아듣기 힘든 억양을 가진 친구도 있었지만, 그와 중도하차한 멤버들의 차이점은 ‘계속해서 말을 하려고 했던 의지’가 아니었나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특유의 영어에 적응해서 점점 더 알아듣기 쉬워졌다고 느꼈고, 한 달 후에 우리는 서로의 영어를 따라하며 농담까지 만들곤 했었다. 비단 워크캠프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을 반 년간 다니면서 얻은 하나의 실마리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은 내향적이냐, 외향적이냐를 판가름하는 성격의 차이가 아니다. 성격과는 전혀 별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에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유럽에서의 기본 가치다. 유럽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What do you want to do?’가 아닐까 한다. 여러 가지 선택안과 대안이 있을 때 반드시 나는 내 의지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내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네 의견에 따르겠다’는 식으로 넘겨버리면 사람들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시아의 사고방식으로는 무엇을 원하냐는 이 질문 자체가 낯설게 느껴진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면, 친구와 점심 메뉴로 무엇을 같이 먹을까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너 먹고 싶은 것 먹자’가 예의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에는 오히려 조심스럽다. 내가 릴에서 처음 힘들게 적응해야 했던 것도 이 가치관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그 때는 잠재적으로만 의식하던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워크캠프를 할 때 즈음에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한 문구로 내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나는 워크캠프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의 의지를 표현하곤 했다. 그 결과, 나는 릴 때와는 달리,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만한 워크캠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먼저 우리 캠프에서 리더인 Camille로부터 우리에게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우리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리더에게 우리는 내일 9시에 모인다고 지령을 주었을 때, 리더는 그녀 앞에 보이는 몇 몇 멤버들에게만 그 지령을 전달하며, 그것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 다음 날 아침에는 전혀 몰랐다는 몇 몇 멤버들이 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멤버들이 모여 이 문제에 대해 회의를 했는데, 가끔 듣고 있기만 했던 멤버들이 있어서 Marta가 ‘동의한다면 너도 언급을 좀 해라’라는 식으로 의지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유럽에서 침묵은 잠정적 동의가 아닌 ‘무관심’ 혹은 잠정적으로는 ‘반대’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예로는, 매니저이자 우리의 친구이기도 했던 Jean-mi가 나에게 농담을 걸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몇몇 멤버들과 함께 마을을 산책할 때 우리는 귀여운 고양이를 발견해 귀여워해주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향해 “Stop ! Don't try to eat this cat.” 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전부터 보신탕에 대해 물어보는 외국 친구들에게 실상을 설명해주기는 했었지만, 이런 농담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농담거리로 만든 것에 기분이 적잖이 언짢았다. 만약 프랑스를 가기 전 한국에만 있었던 나였다면, ‘잘 모르니까 그랬겠지’라며 나 혼자 기분 나쁘고 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그룹 전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리면서까지 내 기분 나쁨을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대로 침묵하는 것이 더 안 좋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동안 내가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뒤돌아가는 그를 다시 불러 나는 그러한 농담을 좋아하지도 않고, 네가 우리의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그렇게 농담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한 너의 잘못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진심을 다해 내 의지 표현을 했고, 그는 진심으로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는 아시아 문화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그런 농담에 네가 기분 나쁠 것이라고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진심을 들려주면서 나는 전보다 좀 더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캠프를 떠날 때 이미 그는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나의 진정한 친구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런 문화적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모든 한국인이 애완동물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고, 한국에 가면 골목마다 보신탕 집이 있어 보신탕이 평범한 식단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런 것에 대해 물어본다면 내가 직접 설명해주면서 사실을 시정해 줄 수 있고, 나아가서는 그런 식습관이 나온 배경까지도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한다. 혹자는 잘 모른 채로 농담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이건 혼자 삭이면서 웃어넘기지 말고 그것을 그에게 바로 일러주라. 나는 너의 농담에 기분이 나쁘다는 의지를 표현하라. 만약 그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가 이상한 사람일 뿐이지만, 내가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도 내가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캠프에서 중도하차 했던 두 사람은 모두 이런 ‘의지 표현’을 잘 하지 않았던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을 향해 다른 멤버들은 ‘shy'하다는 수식어를 곧잘 붙이곤 했다.
그렇다고 외국인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한국인의 사고가치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없거니와, 한국인의 가치관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의 사고가치 중 ‘예의’가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럽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예의’가 늘 몸과 마음에 배어있던 한국인이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얘기를 시작하면 끝까지 들어주기,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기,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려고 노력하기 등 기본적으로는 한국인의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리고 여기에 유럽에서 배운 욕구 및 의지를 표현하는 가치관을 더했더니, 멤버들 모두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친절하고 또 재밌는 한국인이라고 표현했다. 한 친구는 동양인은 수줍음을 잘 탄다는 자신의 선입견을 내가 깨뜨렸다고 했다. 다른 한 친구는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 적응하려던 내 도전기는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나 되어야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첫 번째 기회에서 얻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 없었다면 두 번째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두 번째나 첫 번째 모두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축제 당일이 다가오면서는 마을에서 축제 소품을 만들거나 리허설 장을 꾸미고, 무대 설치를 하는 직접적인 준비 작업을 했다. 이틀 양일 동안 최소 4000명의 관객은 와야 수익 구조가 맞는다고 했는데, 첫 날은 1000명도 채 안되어 약간 조바심이 일었다. 축제 당일 날 나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파는 일을 했었다. 초급 실력 정도의 프랑스어로도 어떻게든 알아들어서 샌드위치를 팔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눅 들지 않았던 내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다. 워크캠프 내내 가장 아쉬웠던 게 내 프랑스어 실력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어만 중급 수준으로 말할 수 있었다면 마을의 주민들과도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 대부분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던 탓에 나는 단어 위주로 알아듣고 단어 위주로만 말했고, 여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친구 몇 몇을 만났던 것에는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에 프랑스를 갈 기회가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언어 실력을 키워서 가고 싶다. 이건 스페인 출신의 Marta를 보면서 느낀 것이었는데, 그녀는 능숙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곤 했었다.
축제 둘째 날이자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3500명 정도 왔다고 하는데, 그 작은 마을 광장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마지막 아티스트가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우리의 매니저이자 친구였던 Jean-mi는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가 열심히 홍보하고 도와준 탓에 이렇게 성공적으로 축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의 공기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 사람들의 열기, 진동과 함께 들리는 노랫소리, 멤버들의 웃음소리와 그들의 온기. 그렇게 우리는 끝을 실감하고 있었다. 정신없게 3주가 지나가고 이제 일 주일도 채 안 남았던 것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축제는 끝났고 다음날부터 우리는 마무리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이 워크캠프를 우리 같은 자원봉사자들이 더 보람차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축제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들었던 리허설 장을 해체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하면서 우리는 이 캠프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서로에게 롤링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고, 우리의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게 근사한 걸 만들어보자며 친구들이 제시한 것은 바로 ‘스시’였다. 캠프의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쉐프를 맡게 됐는데, 여기에는 릴에 있을 때 기숙사에서 스시를 만들던 한 친구를 떠올렸던 게 크게 작용했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지만, 손이 꽤 많이 필요해서 많은 친구들이 부엌으로 출동해 함께 만들었는데, 이 때 나는 한국에서 사촌이 보내 준 짜파게티도 만들어 스시와 함께 내놓았다. 놀라웠던 것은 스시도 스시였지만, 짜파게티를 다들 너무 좋아라했다는 점이다. 양파를 썰어 같이 볶고 마지막에 오이까지 썰어 넣었던 나름 정성이 들어간 짜파게티였던 지라 그 호응에 더 없이 기뻤다. 그렇게 최후의 만찬까지 끝내고는, 그 날 저녁 Emelie가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캠프를 먼저 떠났고, Ali는 다음 날 모두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아침 7시 즈음에 떠났다. 그들과는 달리 하루 더 남게 된 우리들은 정들었던 숙소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지막 날을 보냈다.
한편, 우리 숙소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층은 소파가 잔뜩 놓인 거실이고, 2층은 남녀 구분 없이 다 함께 매트 하나씩 깔고 잠을 청했던 우리의 침실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샤워실이 숙소에서 5분 떨어진 거리에 있어서 매일 우리는 샤워를 향해 떠나는 짧은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면, 샤워를 간다며 누가 나랑 동행하겠느냐 묻는 것이 우리의 아침 일과였던 셈이다.
Sauveterre는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또 사람들 간의 정이 있는 마을이었다. 정사각형의 광장을 따라 마을의 상가가 자리잡고 있었고, 숙소에서 단 3분만 걸어나가도 바로 광장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15분이면 마을 한 바퀴를 돌 수 있을만큼 아담한 맛이 있었다. 파란 하늘은 뜨거운 햇빛을 오후 9시나 되어서야 거둬가기 시작했고, 11시 쯤에는 기온이 떨어지던 산골 마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의례 새벽비가 내리곤 했었다. 매일 아침이면 Camille이 마을의 하나 뿐인 빵집에서 바게트를 3~4개씩 가져왔고, 커피를 사랑하는 Ali는 늘 커피 향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아침 잠이 많은 나보다도 더 늦게 일어나곤 했던 Sasha는 내가 샤워를 갈 때는 꼭 자기를 깨워서 같이 가라는 부탁을 해놔서 우리는 늘 함께 샤워를 하러 나섰고, 노래를 사랑하는 Emelie는 우리가 신나서 춤을 출 때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기타를 늘 들고 다녔던 Pol은 시도 때도 없이 기타를 퉁기며 우리를 신나게 했고, 사랑에 빠진 Natalie는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새벽에 나를 흔들어 깨워 고민을 털어놓던 Marta는 내가 캠프에 있어 다행이라고 거듭 얘기해 주었고,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모두가 낮잠을 청하던 쉬는 시간에도 Kristina는 햇살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저녁이면 마을의 젊은이들이 우리 숙소 앞으로 와인, 보드카 등을 들고 나타나 저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댔고, 그 파티는 늘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곤 했지만 그 때가 되면 남아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곳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 받았고, 하루하루 지날 수록 나는 즐거워졌고, 행복을 느꼈으며, 또 자유로워졌다.
돌이켜보면 유럽에 있던 7개월 중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이 바로 Sauveterre에서의 한 달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 소중히, 더 열심히 그 순간을 대했고, 그 덕분에 정말로 보람차고 의미있는 경험을 했다. 앞으로도 새로운 것을 시작 하게 된다면, Sauveterre를 향해 파리에서 시작한 그 떨렸던 여정을 떠올리며 어떤 일도 즐겁게 해 나갈 각오를 다져가고 싶다.
릴에서 보낸 4개월은 내게는 ‘유럽 생활 적응기’라고 해도 될 만큼 한국을 많이 그리워하기도 했고, 어딜 가더라도 집중되곤 하던 동양인을 향한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었다. 프랑스어로 소통이 되지 않는 나였고, 언어가 되지 않으니 그들과 친구가 되기 힘들다고 느꼈다. 그래서 프랑스 친구들을 사귀기보다는 다른 국적의 교환학생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고, 이에 이 4개월은 스스로 생각했을 때도, 썩 완벽한 적응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하루 빨리 프랑스를 벗어나 다른 국가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워크캠프 지역으로 다시 프랑스를 택한 것은 스스로도 꽤 놀라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시 프랑스를 택하게 된 이유는, 내 스스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던,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던 첫 프랑스 생활에서 배운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다시 프랑스 생활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택하게 된 워크캠프 프로그램은 ‘Sauveterre de rouergue'라는 프랑스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열리는 레게 뮤직 페스티발의 자원봉사자 일이었다.
릴은 벨기에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부의 도시라, 쌀쌀하고 흐린 날씨가 보통이었으나, Sauveterre는 스페인과 가까운 완연한 남부의 도시, 날씨는 맑고 북부 사람들과 다른 남부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다. 모든 조건이 다른 이 새로운 지역에서라면 나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또, 파티 문화를 즐기는 나였기에 무엇보다도 축제 분야에서 워크캠프를 하고 싶었고, 다른 워크캠프 프로그램과 달리 이 프로그램이 무려 한 달간의 ‘생활’이었던 점도 선택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첫 날, 파리에서 아침부터 시작한 기차 여행은 오후 5시나 되어서야 ‘Naucelle'이라는 작은 시골 역에서 끝을 맺었다. 리더는 프랑스인 Camille이었고, 다른 멤버들은 스페인 출신 Marta, Pol, 러시아 출신 Natalie, 우크라이나 출신 Sasha, 벨로루시 출신 Kristina, 터키 출신 Ali, Alper, 핀란드 출신 Emelie, 그리고 한국에서 온 세진과 나를 포함해서 총 인원은 11명이었다. 어색했던 첫 만남은 마을 사람들과 바비큐를 하면서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묻고, 출신지 등을 묻기 시작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캠프가 끝날 즈음엔, 우리 첫 만남 때 서로 어색했던 것 생각나냐면서 그 때는 이 캠프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고 얘기를 털어놓곤 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달은 크게는 네 시기로 구분 할 수 있었다. 홍보 및 마케팅 2주, 축제 소품 및 무대 설치 1주, 축제 당일 이틀, 축제 마무리 정리 1주일. 축제 홍보를 하곤 했던 첫 2주는 사실 일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하루에 2~3시간 씩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특히 이 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이 때가 캠프 기간 중 가장 여유로웠던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축제로 이동해서 우리의 축제를 홍보하곤 했었는데, 말했듯이 한 시간 씩 교대로 일을 하고나면 그 날의 임무는 모두 끝이라서, 밤 늦게까지 다른 축제를 즐길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함께 노래하고, 같이 춤추며 수많은 콘서트, 쇼 등을 관람했고, 그런 시간들이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기상도 11시였고, 차를 타고 홍보하러 나가는 것도 오후 2시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4일에 한 번씩은 프리데이였는데, 이 때는 마을에 있는 수영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바비큐 타임을 가지곤 했었다. 레게 뮤직 페스티발이라서 음악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레게’라는 장르는 처음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듣다보니 또 즐거워지곤 했었다. 매끼 식사는 조를 정해서 점심과 저녁을 만들곤 했는데,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 숙소 앞으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모이곤 해서, 우리는 매일매일 파티를 벌이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한편, 이렇게 즐거웠던 우리였지만, 여기에는 예상치 못했던 중도하차 인원이 생기기도 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늘 조용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던 한 친구가 캠프 생활 1주일도 안 되어 캠프를 떠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우리는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었고, 그는 그렇게 캠프를 떠났다. 캠프 2주하고도 반이 지났을 때는 또 한 명의 결원이 생겼는데, 그녀 역시 영어가 그렇게 능숙치 않아서, 그 탓에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차질이 있었다. 일련의 중도 하차 멤버들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어느 정도의 언어 능력은 물론 필수이지만, 언어가 능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입을 닫기 시작하면 커뮤니케이션의 기회의 문 또한 닫힌다는 것이다. 캠프에는 다양한 출신지의 멤버들이 있었고 저마다의 억양과 표현으로 영어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알아듣기 힘든 억양을 가진 친구도 있었지만, 그와 중도하차한 멤버들의 차이점은 ‘계속해서 말을 하려고 했던 의지’가 아니었나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특유의 영어에 적응해서 점점 더 알아듣기 쉬워졌다고 느꼈고, 한 달 후에 우리는 서로의 영어를 따라하며 농담까지 만들곤 했었다. 비단 워크캠프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을 반 년간 다니면서 얻은 하나의 실마리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은 내향적이냐, 외향적이냐를 판가름하는 성격의 차이가 아니다. 성격과는 전혀 별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에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유럽에서의 기본 가치다. 유럽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What do you want to do?’가 아닐까 한다. 여러 가지 선택안과 대안이 있을 때 반드시 나는 내 의지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내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네 의견에 따르겠다’는 식으로 넘겨버리면 사람들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시아의 사고방식으로는 무엇을 원하냐는 이 질문 자체가 낯설게 느껴진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면, 친구와 점심 메뉴로 무엇을 같이 먹을까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너 먹고 싶은 것 먹자’가 예의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에는 오히려 조심스럽다. 내가 릴에서 처음 힘들게 적응해야 했던 것도 이 가치관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그 때는 잠재적으로만 의식하던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워크캠프를 할 때 즈음에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한 문구로 내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나는 워크캠프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의 의지를 표현하곤 했다. 그 결과, 나는 릴 때와는 달리,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만한 워크캠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먼저 우리 캠프에서 리더인 Camille로부터 우리에게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우리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리더에게 우리는 내일 9시에 모인다고 지령을 주었을 때, 리더는 그녀 앞에 보이는 몇 몇 멤버들에게만 그 지령을 전달하며, 그것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 다음 날 아침에는 전혀 몰랐다는 몇 몇 멤버들이 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멤버들이 모여 이 문제에 대해 회의를 했는데, 가끔 듣고 있기만 했던 멤버들이 있어서 Marta가 ‘동의한다면 너도 언급을 좀 해라’라는 식으로 의지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유럽에서 침묵은 잠정적 동의가 아닌 ‘무관심’ 혹은 잠정적으로는 ‘반대’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예로는, 매니저이자 우리의 친구이기도 했던 Jean-mi가 나에게 농담을 걸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몇몇 멤버들과 함께 마을을 산책할 때 우리는 귀여운 고양이를 발견해 귀여워해주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향해 “Stop ! Don't try to eat this cat.” 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전부터 보신탕에 대해 물어보는 외국 친구들에게 실상을 설명해주기는 했었지만, 이런 농담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농담거리로 만든 것에 기분이 적잖이 언짢았다. 만약 프랑스를 가기 전 한국에만 있었던 나였다면, ‘잘 모르니까 그랬겠지’라며 나 혼자 기분 나쁘고 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그룹 전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리면서까지 내 기분 나쁨을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대로 침묵하는 것이 더 안 좋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동안 내가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뒤돌아가는 그를 다시 불러 나는 그러한 농담을 좋아하지도 않고, 네가 우리의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그렇게 농담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한 너의 잘못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진심을 다해 내 의지 표현을 했고, 그는 진심으로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는 아시아 문화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그런 농담에 네가 기분 나쁠 것이라고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진심을 들려주면서 나는 전보다 좀 더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캠프를 떠날 때 이미 그는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나의 진정한 친구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런 문화적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모든 한국인이 애완동물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고, 한국에 가면 골목마다 보신탕 집이 있어 보신탕이 평범한 식단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런 것에 대해 물어본다면 내가 직접 설명해주면서 사실을 시정해 줄 수 있고, 나아가서는 그런 식습관이 나온 배경까지도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한다. 혹자는 잘 모른 채로 농담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이건 혼자 삭이면서 웃어넘기지 말고 그것을 그에게 바로 일러주라. 나는 너의 농담에 기분이 나쁘다는 의지를 표현하라. 만약 그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가 이상한 사람일 뿐이지만, 내가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도 내가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캠프에서 중도하차 했던 두 사람은 모두 이런 ‘의지 표현’을 잘 하지 않았던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을 향해 다른 멤버들은 ‘shy'하다는 수식어를 곧잘 붙이곤 했다.
그렇다고 외국인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한국인의 사고가치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없거니와, 한국인의 가치관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의 사고가치 중 ‘예의’가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럽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예의’가 늘 몸과 마음에 배어있던 한국인이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얘기를 시작하면 끝까지 들어주기,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기,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려고 노력하기 등 기본적으로는 한국인의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리고 여기에 유럽에서 배운 욕구 및 의지를 표현하는 가치관을 더했더니, 멤버들 모두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친절하고 또 재밌는 한국인이라고 표현했다. 한 친구는 동양인은 수줍음을 잘 탄다는 자신의 선입견을 내가 깨뜨렸다고 했다. 다른 한 친구는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 적응하려던 내 도전기는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나 되어야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첫 번째 기회에서 얻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 없었다면 두 번째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두 번째나 첫 번째 모두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축제 당일이 다가오면서는 마을에서 축제 소품을 만들거나 리허설 장을 꾸미고, 무대 설치를 하는 직접적인 준비 작업을 했다. 이틀 양일 동안 최소 4000명의 관객은 와야 수익 구조가 맞는다고 했는데, 첫 날은 1000명도 채 안되어 약간 조바심이 일었다. 축제 당일 날 나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파는 일을 했었다. 초급 실력 정도의 프랑스어로도 어떻게든 알아들어서 샌드위치를 팔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눅 들지 않았던 내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다. 워크캠프 내내 가장 아쉬웠던 게 내 프랑스어 실력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어만 중급 수준으로 말할 수 있었다면 마을의 주민들과도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 대부분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던 탓에 나는 단어 위주로 알아듣고 단어 위주로만 말했고, 여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친구 몇 몇을 만났던 것에는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에 프랑스를 갈 기회가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언어 실력을 키워서 가고 싶다. 이건 스페인 출신의 Marta를 보면서 느낀 것이었는데, 그녀는 능숙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곤 했었다.
축제 둘째 날이자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3500명 정도 왔다고 하는데, 그 작은 마을 광장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마지막 아티스트가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우리의 매니저이자 친구였던 Jean-mi는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가 열심히 홍보하고 도와준 탓에 이렇게 성공적으로 축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의 공기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 사람들의 열기, 진동과 함께 들리는 노랫소리, 멤버들의 웃음소리와 그들의 온기. 그렇게 우리는 끝을 실감하고 있었다. 정신없게 3주가 지나가고 이제 일 주일도 채 안 남았던 것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축제는 끝났고 다음날부터 우리는 마무리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이 워크캠프를 우리 같은 자원봉사자들이 더 보람차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축제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들었던 리허설 장을 해체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하면서 우리는 이 캠프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서로에게 롤링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고, 우리의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게 근사한 걸 만들어보자며 친구들이 제시한 것은 바로 ‘스시’였다. 캠프의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쉐프를 맡게 됐는데, 여기에는 릴에 있을 때 기숙사에서 스시를 만들던 한 친구를 떠올렸던 게 크게 작용했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지만, 손이 꽤 많이 필요해서 많은 친구들이 부엌으로 출동해 함께 만들었는데, 이 때 나는 한국에서 사촌이 보내 준 짜파게티도 만들어 스시와 함께 내놓았다. 놀라웠던 것은 스시도 스시였지만, 짜파게티를 다들 너무 좋아라했다는 점이다. 양파를 썰어 같이 볶고 마지막에 오이까지 썰어 넣었던 나름 정성이 들어간 짜파게티였던 지라 그 호응에 더 없이 기뻤다. 그렇게 최후의 만찬까지 끝내고는, 그 날 저녁 Emelie가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캠프를 먼저 떠났고, Ali는 다음 날 모두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아침 7시 즈음에 떠났다. 그들과는 달리 하루 더 남게 된 우리들은 정들었던 숙소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지막 날을 보냈다.
한편, 우리 숙소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층은 소파가 잔뜩 놓인 거실이고, 2층은 남녀 구분 없이 다 함께 매트 하나씩 깔고 잠을 청했던 우리의 침실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샤워실이 숙소에서 5분 떨어진 거리에 있어서 매일 우리는 샤워를 향해 떠나는 짧은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면, 샤워를 간다며 누가 나랑 동행하겠느냐 묻는 것이 우리의 아침 일과였던 셈이다.
Sauveterre는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또 사람들 간의 정이 있는 마을이었다. 정사각형의 광장을 따라 마을의 상가가 자리잡고 있었고, 숙소에서 단 3분만 걸어나가도 바로 광장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15분이면 마을 한 바퀴를 돌 수 있을만큼 아담한 맛이 있었다. 파란 하늘은 뜨거운 햇빛을 오후 9시나 되어서야 거둬가기 시작했고, 11시 쯤에는 기온이 떨어지던 산골 마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의례 새벽비가 내리곤 했었다. 매일 아침이면 Camille이 마을의 하나 뿐인 빵집에서 바게트를 3~4개씩 가져왔고, 커피를 사랑하는 Ali는 늘 커피 향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아침 잠이 많은 나보다도 더 늦게 일어나곤 했던 Sasha는 내가 샤워를 갈 때는 꼭 자기를 깨워서 같이 가라는 부탁을 해놔서 우리는 늘 함께 샤워를 하러 나섰고, 노래를 사랑하는 Emelie는 우리가 신나서 춤을 출 때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기타를 늘 들고 다녔던 Pol은 시도 때도 없이 기타를 퉁기며 우리를 신나게 했고, 사랑에 빠진 Natalie는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새벽에 나를 흔들어 깨워 고민을 털어놓던 Marta는 내가 캠프에 있어 다행이라고 거듭 얘기해 주었고,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모두가 낮잠을 청하던 쉬는 시간에도 Kristina는 햇살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저녁이면 마을의 젊은이들이 우리 숙소 앞으로 와인, 보드카 등을 들고 나타나 저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댔고, 그 파티는 늘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곤 했지만 그 때가 되면 남아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곳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 받았고, 하루하루 지날 수록 나는 즐거워졌고, 행복을 느꼈으며, 또 자유로워졌다.
돌이켜보면 유럽에 있던 7개월 중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이 바로 Sauveterre에서의 한 달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 소중히, 더 열심히 그 순간을 대했고, 그 덕분에 정말로 보람차고 의미있는 경험을 했다. 앞으로도 새로운 것을 시작 하게 된다면, Sauveterre를 향해 파리에서 시작한 그 떨렸던 여정을 떠올리며 어떤 일도 즐겁게 해 나갈 각오를 다져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