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프랑스 남부, 낯선 마을에서의 3주
PUY L'EVEQUE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막연한 선택이였다. 중세 건축에 관심이 있는 나로선 프랑스를 굳이 고집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인포싯에 떡하니 적혀 있는 영어 이외의 공용어 사용은 오히려 나를 숨막히게 했었다. 찌는 듯한 한 여름의 더위에 수도 파리 근처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프랑스 남부의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마을, 그 생소한 어감 조차 하루 이틀 다가오는 워크캠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더 부풀리기만 했다.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하기 전 나는 10주 조금 넘게 필리핀 고지대에서 한국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열대야 소식, 더위를 피하기 위해 계곡이나 바다로 무리지어 피서 간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먼 곳에서 살았다. 바람이 기분좋게 이마를 쓸어내리는 그 곳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두 눈 앞에 펼쳐지는 하늘색 뭉게구름의 광활한 파노라마. 이는 또 다른 이국에 대한 환상을 부풀렸고 그 환상으로 가득찬 드넓은 땅 위 금발벽안의 낯선 외국인들과 삼주 동안을 동거동락하며 나눌 경험, 고민과 생각의 무수한 아름다운 꼬리들이 지금의 나를 또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킬지 궁금했다.
사실 이미 시작된 타지에서의 생활의 끝에서 나에 대해,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의감으로 지쳐 나를 보는 방식이 불안정해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의 나사가 하나둘씩 엇나갈 때 시간은 늘 그렇듯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안 올것만 같았던 프랑스에서의 워크캠프도 드디어 '오늘'을 가르키고 있었다. 처음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에 실수가 허용된다면 좋으련만 마치 황량한 백지 위에 덩그러니 있으려니, 수많은 금발벽안 사이의 소수자로 있으려니 생경한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우아하게만 들리던 불어는 어느샌가 나를 소외시키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위축되면서 솔직하게, 부푼 환상으로만 가득찼던 낯선 땅에서의 첫 인상은 거품이였다.
사실, 워크캠프를 떠나기 전 파리에서 머문 3일 간의 자유여행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이 곳, 프랑스 한 나라에만 집중된 것만 같이 느끼기도 했다. 하늘 높이 뻗은 고딕양식 중세건축의 산실이 유네스코의 엄호 아래 거대한 기운을 뽐내는 것만 같았고 아름답지 않는 것은 죄인 것 마냥 무심코 지나치는 것에까지 아름다움이 베여있었다. 실내로 들어갔을 때의 나를 누르는 숭고한 중압감은 내가 이제껏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것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날려버리기도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수십 번 입밖으로 내뱉고 보이지 않는 별빛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경조명을 뒤로하고 몸을 싣은 프랑스 남부행 떼제베. 미팅포인트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가 없다는 사실은 감안한다면 첫 아침 남부행 떼제베는 필수였지만, 아차, 바쁜 아침 갑작스럽게 메트로 티켓기계에 체크카드가 먹히고 28인치 케리어를 가지고 끙끙거리며 내려간 메트로 5호선은 갑작스런 공사가 시작됐단다. 다시 올라가 그렇게 타지 않을 꺼라 다짐하던 택시를 잡아끌고 겨우 도착한 역에선 1분 차이로 벌써 기차가 출발해버려 표를 다시 예약해야 한단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30분 이내에 직행은 아니지만 환승하는 기차가 기다리고 있단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꺄오흐'역에서 미리 타려고 했던 버스는 이미 떠나버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마지막 버스를 타야하는데 리더가 캠퍼들을 픽업하기로한 예상 시간보다 2시간이나 훌쩍 지나버려 이 소식을 리더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런데 잠시 머무는 프랑스에서 로밍을 하지도, 개통을 하지도 않고 무작정 왔기에 어떠한 연락 수단도 없었다. 역에 위치한 공중전화 부스는 유로동전을 이용하는 방식이 아닌 공중전화용 카드를 만들어야만 이용이 가능했기에 나에겐 무용지물이였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티켓부스에 가서 발영어로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며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도 한 번에 포기한다면 돌아가야만 했기에 다시 끈질기게 요청을 했고 티켓부스의 직원은 나를 역 오피스로 데려갔다. 가까스로 프랑스 워크캠프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고 나의 상황을 감안해 캠프 리더에게 도착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넣어 놓는단다. 휴. 이러다 마지막 버스를 탄다해도 도착 할 미팅장소에서 꼬박 하루 밤을 새는 게 아닌가, 하루 밤을 새는 건 고사하더라도 리더가 나를 불참자로 생각해 어딘지도 모를 워크캠프 장소 주위만 헤매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얕지 않은 고민으로 울먹거릴때쯤, 가까스로 해결된 문제에 한숨 돌리고 있을 때쯤, 갑자기 나타난 금발과 흑발, 두 명의 터키인들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퓌에리베크?'라 묻는다. 그렇다. 퓌에리베크는 내가 워크캠프를 할 장소의 이름. 간단한 손인사를 나누고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나눴다. 사실 이미 지칠대로 지친터라 처음 만난 캠퍼들에게 주고 싶었던 환한 웃음은 온데간데 없고 다행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터키 캠퍼들을 따라 타고간 퓌에리베크행 마을은 역에서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고, 말로만 듣던 그 중세도시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숨겨뒀던 눈물들이 저 오-래된 벽돌 틈사이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들리진 않았지만 들리는 것만 같았던 중세음악이 그 도시 전체를 감싸 흐르는 것만 같았고 내가 밟고 서있는 이 작은 돌 위에 나의 흔적이 드디어 새겨졌다는 부푼 느낌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우리를 마중나온 캠프 리더들은 각각 캐나다 퀘백과 프랑스 파리에서 온 현지인들이었고 이 곳의 현지사정을 잘 아는 또래의 학생들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찾아들어간 우리의 숙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피 시에서 제공하는 프랑스 컬리지의 기숙사. 늦게 도착한 우리를 뒤로하고 그 기숙사에는 다양한 국적의 캠퍼들이 이미 제각기 자신들이 원하는 방과 침대의 위치를 정하고 짐을 모두 다 옮긴 상태였다. 나와 같은 국적의 한국인 언니와 언니와 같은 방을 쓰기로 한 독일인 릴리, 그리고 옆 방에 세 명의 남학생 폴란드인 얀과 러시아인 테오형제. 그 바로 옆 방엔 내가 역에서 만난 두 명의 터키 여학생. 알고보니 터키 여학생을 둘 다 앙카라대학에서 의대를 다니는 재원들이었다. 이 터키 여학생과 방을 함께 쓰는 캠퍼 리더 둘. 마지막으로 다음 주가 되어서야 도착한 귀여운 스페인 여학생 두 명 이렇게 총 열 두명의 캠퍼들이 프랑스 퓌에리베크에 모였다.
사실 내가 이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읽지 않은 불찰을 탓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중세도시에 관심이 있었고 중세성을 보수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둘째 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중세성을 보수하는 일이 아니라 나무 뿌리 근처에 흙과 돌이 씻겨나가 조그만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곳에 길다란 돌담을 쌓는 일. 무거운 직사각형 모양의 회색 공업용 벽돌을 하나씩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 돌담 쌓는 작업의 중심이 되는 이본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하나 둘씩 각자의 역할과 그에 맞는 구색을 맞춰나갔다. 벽돌을 이미 할아버지께서 심어놓으신 철심을 따라 설치한 뒤 벽돌의 빈 공간 속에 시멘트와 비슷한 마흐티를 차곡차곡 부어놓는 작업을 하루 5시간씩 꼬박 일주일을 지속했다. 회벽돌이 어느 정도 쌓아 모양새가 갖춰지면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보는 예쁜 노오란 벽돌담처럼 쌓기 좋게 제단된 노란 돌을 선별해 그 앞에 다시 하나 둘씩 쌓는 일이다. 모난 부분은 다시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망치로 부수기도 하고 망치로 부숴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춰진 돌은 그 크기와 높이가 옆의 돌들과 일정한지 다시 재확인하는 작업까지. 사실 이외에도 세세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는데 그저 단순한 '돌담'이라는 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작업의 연속과 세세한 손길이 닿아야 완성될 수 있는지 다시금 느꼈다. 돌담 하나 하나에 박힌 그 돌들에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하며 완성됐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재작업을 들어가거나 하는 일까지. 새벽 6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일터로 향할때면 사실 이 곳에 온 목적을 상실하기도 했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있어 첫 번째로, 그리고 혹시나 내 인생에서 마지막 경험일 수도 있는 그 일들을 곱씹어 보는 지금에서, 얼마나 큰 행운이 나와 캠퍼들과 함께 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일을 마치고 나면 주로 리더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과 활동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가지고 하는 지 브리핑으로 매일의 활동들의 서문을 열었다. 사실 첫째 날 아침 일찍 돌담 쌓는 작업으로 아침과 이른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샤워를 하면 몸에 형언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와 한국에선 없었던 버릇이 생긴다. 바로 일정시간의 낮잠. 일이 끝나고 나면 점심 식사를 하고 2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첫째 주는 거진 갑작스럽게 생겨난 버릇으로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사실 우리가 캠프에 참여한 기간은 퓌에리베크의 축제와 기간이 맞물려 자유시간 이후 단체 그룹 액티비티 시간에는 지역축제에 참여를 하거나 지역주민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워크캠프 기간 동안 함께한 이 지역에 사는 또래들의 파티에 초대받아 생전 경험하지 못한 혹은 못할 일들을 하루 동안에 체험해본다거나(주로 주말) 하는 일들로 스펙타클한 액티비티를 보냈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불꽃축제. 불꽃축제는 지역 축제 기간 동안 시에서 실시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는데 일반적으로 이 축제에 참여하려 한다면 일정 금액의 유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대한 비용을 아끼고자 리더가 생각해낸 방안은 축제에 필요한 일손을 돕는 일로 입장료를 대체하는 일. 시에서는 흔쾌히 이 제안을 수락했고 우리는 오후부터 약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테이블과 의자를 셋팅하는 작업을 도왔다. 오후 내리쬐는 태양볕 아래 금발, 흑발의 봉사자들이 일손을 돕고 있는 것이 기특했는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생수 페트병을 무료로 나눠주시거나 하는 등 오히려 우리가 다른 지역 주민분들로 부터 도움을 받아 생경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정 시간의 봉사를 마치고 해가 점차 저물자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우리가 직접 차려놓는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와인이며 바게트며 퓌에리베크를 돌아흐르는 운치있는 강물과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식을 주문하고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밤이 늦도록 떠날 줄 몰랐다. 우리 캠퍼들은 강가 바로 앞에 배를 탈 수 있도록 마련된 나무 발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을 잡거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었고 나와 한국인 언니는 퓌에리베크의 밤 하늘에 매일 수놓는 아름다운 무수한 별들의 행진이 곧 아름답게 퍼질 불꽃과 얼마만큼의 시너지를 낼지 궁금해 밤하늘을 보며 누웠다. 장관이였다. 터트려지는 불꽃이 장관이였고, 터트려지는 불꽃이 연속해서 터지는 다른 형체의 불꽃과 잠시 겹치는 모습, 그 겹치는 모습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그림같은 이야기, 하늘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이 강물에 비춰 또 다르게 만들어내는 반대의 풍경은 나와 캠퍼들과 그 시간 그 공간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물들였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굳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는 것은 너무 힘들다. 정말 힘든 일도 많았고 예상과 다른 작업량의 강도와 언어가 주는 커다란 소외감과 외로움, 서로 다른 문화, 다른 문화에서 생기는 갈등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 3주 동안 지속되었기도 했고 짙어졌다가 옅어졌고 옅어졌다 다시 짙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워크캠프란 이름아래 세계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열 명이 조금 넘는 다른 국적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같은 일을 서로 함께 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느끼는 것이 워크캠프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이 짧은 기간 동안 그 무수한 일들을 체험하고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것들과 다시금 느끼고 새로이 느끼는 것들이 기존의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는 소중하고 값진 체험들. 분명히 많이 힘들것 이고 외롭기도 할테지만 만약 누군가가 다시 워크캠프 참여해보지 않을래 묻는다면 난 언제든지 예스다.
사실 이미 시작된 타지에서의 생활의 끝에서 나에 대해,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의감으로 지쳐 나를 보는 방식이 불안정해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의 나사가 하나둘씩 엇나갈 때 시간은 늘 그렇듯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안 올것만 같았던 프랑스에서의 워크캠프도 드디어 '오늘'을 가르키고 있었다. 처음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에 실수가 허용된다면 좋으련만 마치 황량한 백지 위에 덩그러니 있으려니, 수많은 금발벽안 사이의 소수자로 있으려니 생경한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우아하게만 들리던 불어는 어느샌가 나를 소외시키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위축되면서 솔직하게, 부푼 환상으로만 가득찼던 낯선 땅에서의 첫 인상은 거품이였다.
사실, 워크캠프를 떠나기 전 파리에서 머문 3일 간의 자유여행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이 곳, 프랑스 한 나라에만 집중된 것만 같이 느끼기도 했다. 하늘 높이 뻗은 고딕양식 중세건축의 산실이 유네스코의 엄호 아래 거대한 기운을 뽐내는 것만 같았고 아름답지 않는 것은 죄인 것 마냥 무심코 지나치는 것에까지 아름다움이 베여있었다. 실내로 들어갔을 때의 나를 누르는 숭고한 중압감은 내가 이제껏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것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날려버리기도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수십 번 입밖으로 내뱉고 보이지 않는 별빛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경조명을 뒤로하고 몸을 싣은 프랑스 남부행 떼제베. 미팅포인트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가 없다는 사실은 감안한다면 첫 아침 남부행 떼제베는 필수였지만, 아차, 바쁜 아침 갑작스럽게 메트로 티켓기계에 체크카드가 먹히고 28인치 케리어를 가지고 끙끙거리며 내려간 메트로 5호선은 갑작스런 공사가 시작됐단다. 다시 올라가 그렇게 타지 않을 꺼라 다짐하던 택시를 잡아끌고 겨우 도착한 역에선 1분 차이로 벌써 기차가 출발해버려 표를 다시 예약해야 한단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30분 이내에 직행은 아니지만 환승하는 기차가 기다리고 있단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꺄오흐'역에서 미리 타려고 했던 버스는 이미 떠나버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마지막 버스를 타야하는데 리더가 캠퍼들을 픽업하기로한 예상 시간보다 2시간이나 훌쩍 지나버려 이 소식을 리더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런데 잠시 머무는 프랑스에서 로밍을 하지도, 개통을 하지도 않고 무작정 왔기에 어떠한 연락 수단도 없었다. 역에 위치한 공중전화 부스는 유로동전을 이용하는 방식이 아닌 공중전화용 카드를 만들어야만 이용이 가능했기에 나에겐 무용지물이였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티켓부스에 가서 발영어로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며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도 한 번에 포기한다면 돌아가야만 했기에 다시 끈질기게 요청을 했고 티켓부스의 직원은 나를 역 오피스로 데려갔다. 가까스로 프랑스 워크캠프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고 나의 상황을 감안해 캠프 리더에게 도착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넣어 놓는단다. 휴. 이러다 마지막 버스를 탄다해도 도착 할 미팅장소에서 꼬박 하루 밤을 새는 게 아닌가, 하루 밤을 새는 건 고사하더라도 리더가 나를 불참자로 생각해 어딘지도 모를 워크캠프 장소 주위만 헤매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얕지 않은 고민으로 울먹거릴때쯤, 가까스로 해결된 문제에 한숨 돌리고 있을 때쯤, 갑자기 나타난 금발과 흑발, 두 명의 터키인들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퓌에리베크?'라 묻는다. 그렇다. 퓌에리베크는 내가 워크캠프를 할 장소의 이름. 간단한 손인사를 나누고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나눴다. 사실 이미 지칠대로 지친터라 처음 만난 캠퍼들에게 주고 싶었던 환한 웃음은 온데간데 없고 다행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터키 캠퍼들을 따라 타고간 퓌에리베크행 마을은 역에서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고, 말로만 듣던 그 중세도시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숨겨뒀던 눈물들이 저 오-래된 벽돌 틈사이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들리진 않았지만 들리는 것만 같았던 중세음악이 그 도시 전체를 감싸 흐르는 것만 같았고 내가 밟고 서있는 이 작은 돌 위에 나의 흔적이 드디어 새겨졌다는 부푼 느낌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우리를 마중나온 캠프 리더들은 각각 캐나다 퀘백과 프랑스 파리에서 온 현지인들이었고 이 곳의 현지사정을 잘 아는 또래의 학생들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찾아들어간 우리의 숙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피 시에서 제공하는 프랑스 컬리지의 기숙사. 늦게 도착한 우리를 뒤로하고 그 기숙사에는 다양한 국적의 캠퍼들이 이미 제각기 자신들이 원하는 방과 침대의 위치를 정하고 짐을 모두 다 옮긴 상태였다. 나와 같은 국적의 한국인 언니와 언니와 같은 방을 쓰기로 한 독일인 릴리, 그리고 옆 방에 세 명의 남학생 폴란드인 얀과 러시아인 테오형제. 그 바로 옆 방엔 내가 역에서 만난 두 명의 터키 여학생. 알고보니 터키 여학생을 둘 다 앙카라대학에서 의대를 다니는 재원들이었다. 이 터키 여학생과 방을 함께 쓰는 캠퍼 리더 둘. 마지막으로 다음 주가 되어서야 도착한 귀여운 스페인 여학생 두 명 이렇게 총 열 두명의 캠퍼들이 프랑스 퓌에리베크에 모였다.
사실 내가 이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읽지 않은 불찰을 탓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중세도시에 관심이 있었고 중세성을 보수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둘째 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중세성을 보수하는 일이 아니라 나무 뿌리 근처에 흙과 돌이 씻겨나가 조그만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곳에 길다란 돌담을 쌓는 일. 무거운 직사각형 모양의 회색 공업용 벽돌을 하나씩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 돌담 쌓는 작업의 중심이 되는 이본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하나 둘씩 각자의 역할과 그에 맞는 구색을 맞춰나갔다. 벽돌을 이미 할아버지께서 심어놓으신 철심을 따라 설치한 뒤 벽돌의 빈 공간 속에 시멘트와 비슷한 마흐티를 차곡차곡 부어놓는 작업을 하루 5시간씩 꼬박 일주일을 지속했다. 회벽돌이 어느 정도 쌓아 모양새가 갖춰지면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보는 예쁜 노오란 벽돌담처럼 쌓기 좋게 제단된 노란 돌을 선별해 그 앞에 다시 하나 둘씩 쌓는 일이다. 모난 부분은 다시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망치로 부수기도 하고 망치로 부숴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춰진 돌은 그 크기와 높이가 옆의 돌들과 일정한지 다시 재확인하는 작업까지. 사실 이외에도 세세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는데 그저 단순한 '돌담'이라는 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작업의 연속과 세세한 손길이 닿아야 완성될 수 있는지 다시금 느꼈다. 돌담 하나 하나에 박힌 그 돌들에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하며 완성됐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재작업을 들어가거나 하는 일까지. 새벽 6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일터로 향할때면 사실 이 곳에 온 목적을 상실하기도 했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있어 첫 번째로, 그리고 혹시나 내 인생에서 마지막 경험일 수도 있는 그 일들을 곱씹어 보는 지금에서, 얼마나 큰 행운이 나와 캠퍼들과 함께 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일을 마치고 나면 주로 리더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과 활동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가지고 하는 지 브리핑으로 매일의 활동들의 서문을 열었다. 사실 첫째 날 아침 일찍 돌담 쌓는 작업으로 아침과 이른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샤워를 하면 몸에 형언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와 한국에선 없었던 버릇이 생긴다. 바로 일정시간의 낮잠. 일이 끝나고 나면 점심 식사를 하고 2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첫째 주는 거진 갑작스럽게 생겨난 버릇으로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사실 우리가 캠프에 참여한 기간은 퓌에리베크의 축제와 기간이 맞물려 자유시간 이후 단체 그룹 액티비티 시간에는 지역축제에 참여를 하거나 지역주민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워크캠프 기간 동안 함께한 이 지역에 사는 또래들의 파티에 초대받아 생전 경험하지 못한 혹은 못할 일들을 하루 동안에 체험해본다거나(주로 주말) 하는 일들로 스펙타클한 액티비티를 보냈는데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불꽃축제. 불꽃축제는 지역 축제 기간 동안 시에서 실시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는데 일반적으로 이 축제에 참여하려 한다면 일정 금액의 유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대한 비용을 아끼고자 리더가 생각해낸 방안은 축제에 필요한 일손을 돕는 일로 입장료를 대체하는 일. 시에서는 흔쾌히 이 제안을 수락했고 우리는 오후부터 약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테이블과 의자를 셋팅하는 작업을 도왔다. 오후 내리쬐는 태양볕 아래 금발, 흑발의 봉사자들이 일손을 돕고 있는 것이 기특했는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생수 페트병을 무료로 나눠주시거나 하는 등 오히려 우리가 다른 지역 주민분들로 부터 도움을 받아 생경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정 시간의 봉사를 마치고 해가 점차 저물자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우리가 직접 차려놓는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와인이며 바게트며 퓌에리베크를 돌아흐르는 운치있는 강물과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식을 주문하고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밤이 늦도록 떠날 줄 몰랐다. 우리 캠퍼들은 강가 바로 앞에 배를 탈 수 있도록 마련된 나무 발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을 잡거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었고 나와 한국인 언니는 퓌에리베크의 밤 하늘에 매일 수놓는 아름다운 무수한 별들의 행진이 곧 아름답게 퍼질 불꽃과 얼마만큼의 시너지를 낼지 궁금해 밤하늘을 보며 누웠다. 장관이였다. 터트려지는 불꽃이 장관이였고, 터트려지는 불꽃이 연속해서 터지는 다른 형체의 불꽃과 잠시 겹치는 모습, 그 겹치는 모습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그림같은 이야기, 하늘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이 강물에 비춰 또 다르게 만들어내는 반대의 풍경은 나와 캠퍼들과 그 시간 그 공간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물들였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굳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는 것은 너무 힘들다. 정말 힘든 일도 많았고 예상과 다른 작업량의 강도와 언어가 주는 커다란 소외감과 외로움, 서로 다른 문화, 다른 문화에서 생기는 갈등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 3주 동안 지속되었기도 했고 짙어졌다가 옅어졌고 옅어졌다 다시 짙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워크캠프란 이름아래 세계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열 명이 조금 넘는 다른 국적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같은 일을 서로 함께 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느끼는 것이 워크캠프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이 짧은 기간 동안 그 무수한 일들을 체험하고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것들과 다시금 느끼고 새로이 느끼는 것들이 기존의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는 소중하고 값진 체험들. 분명히 많이 힘들것 이고 외롭기도 할테지만 만약 누군가가 다시 워크캠프 참여해보지 않을래 묻는다면 난 언제든지 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