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페루, 아이들과 함께 웃는 3주
Making a Better School V Piura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 참가기간 : 2012.02.29 - 2012.-03.19
· 참가지역 : 페루 피우라
· 캠프Code 및 Title : PS17 / Making a Better School V Piura
· 활동테마: RENO/ SOCI
· 참가자구성(국적,인원): 4명 / 멕시코, 독일, 프랑스, 한국
#1. 도착 전부터 쌩고생, 집결장소 찾아 삼만리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머무는 동안 나는 세계일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일주를 한다면 하고싶었던 수많은 리스트들 중,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해외봉사.
이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몇몇 해외봉사 프로그램 중 가장 규모도 크고, 다양한 국가를 골라서 갈 수 있는 워크캠프는 당연히 대상 1순위였고 수많은 국가들 중 내 여행 시기와 맞물리는 곳을 고르다보니 지구 반대편의 땅, 남미의 페루가 그 대상이 되었다. 특히나,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이번 봉사는 안성맞춤 그 자체였다! 그렇다 할 영어 자격증 하나 갖추지는 못했지만 운좋게 워크캠프 단원으로 합격하게 되면서 이를 기점으로 내 남미에서의 여행 루트가 만들어졌다.
각종 봉사활동 수기에서도, 이전 여행자들이 쓴 여행서적에서도 종종 거론되던 워크캠프를 갈 수 있게 되다니! 한곳에 머무르면서 지역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여행 또한 꿈꿔왔기 때문에 여행의 시작 전부터 얼마나 워크캠프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해서부터 페루에서 개최되는 워크캠프 집결지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촉박하여 루트가 많이 빡셌기에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던 거진 한달여간의 행군의 쉼표를 찍은 날, 그 날의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전 국가 볼리비아에서 발생한 국민들의 거리시위로 인해 페루로 향하는 단 하나뿐인 길을 막아버려 길 위에서 이틀 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수도 라파즈를 제외하고는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아 미리 연락도 취하지 못한 채 워크캠프 시작 3일 전에서야 겨우 페루 담당자에게 몇일 늦는다는 일방적인 양해의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워크캠프 홈페이지가 잘 열리지 않아 남미에 도착한 이후 제공되어진 상세정보들을 읽지 못하였고, 워크캠프가 열린다는 페루 북부 도시 피우라에 도착한 아침까지 워크캠프가 피우라 내 정확히 어디에서 열리는지도 몰랐다.
그냥 떵 하니 의외로 컸던 도시 피우라에 내려진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강행군에 지쳐 어떻게 할 지를 버스터미널에 앉고 나서야 생각하고 있는 초연한 내게 페루의 교통수단, '톡톡'(바퀴가 세 개 달린 오토바이를 개조한 저렴한 택시)과 택시기사 아저씨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게 정말 끊임없이 조잘조잘 말을 걸어댔고, (아마 좋은 호텔에 데려다 주겠다는 등의 이야기였을 거다) 잠시 후 가장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가진 채 나를 바라보고 계시던 택시기사 아저씨께 조심스레 경찰서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경찰서' 한 마디로 해결했다.
나는 적어도 경찰관들은 영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름 큰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는 내벽의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있고 책상 3개를 갖다 놓은 허술한 모양새 그 자체였다.
이른 일요일 아침 웬 동양 여자애 하나가 지 몸뚱이만한 가방을 짊어메고 경찰서에 들어왔으니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었을까를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난다.
피우라라는 곳은 여행자들이 가지 않는, 즉 여행자들이라고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소도시였기 때문에 길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일 터, 만난 것도 신기하겠지만 제발로 경찰서까지 들어오는 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적어도 경찰서는..' 하며 들어갔던 그곳엔 안타깝게도 인터넷이 되지 않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이 또한 없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같지 않은 대화를 시도했고 곧 인터넷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 그들은 근처에 있는 PC방을 가르켰다.
솔직히 그들 말대로 PC방에 가면서도 상당히 불안했던 게 그동안 여러 PC방 심지어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도 워크캠프 홈페이지에서 제공해 준 '상세정보'를 열려고 시도했었으나 열리지 않아 그 주소를 미리 적어놓지 못했던 터였다.
근심 반 걱정 반을 품은 채 정보창을 열었고 놀랍게도 그 후미진 PC방의 인터넷 속도는 한국을 능가할 정도로 빠른데다 Window7이 깔려 있는 최신식이었고 정보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듯 '떡'하니 열렸다! 혼자 만세삼창을 외치며 주소를 받아 적은 후 경찰서로 돌아갔고 그들은 주소를 받아 들고는 '굿, 굿' 을 외치며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짐을 가지러 온 내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분명 그들은 내게 무슨무슨 말을 했겠으나, 이제 막 스페인어를 듣기 시작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내가 그 말을 알아들었을 리 만무했을 터, 하염없이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 아저씨들에게 피우라 내 여행지와 맛집 등 여러 정보들을 건네받고 궁금해하는 내 이야기를 손짓 발짓 써가며 전해드리기도 하며 우리는 금새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이곳에 봉사를 하러 왔다는 말에 즉, 좋은 일을 하러 왔다는 말에 큰 관심과 호감을 보내왔다.
그렇게 그들과 어우러져 여유로움을 느꼈던 순간도 잠시, 어서 나오라는 소리와 함께 경찰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들은 내 가방을 경찰차 안에 실어 넣으며 아쉬움의 인사를 건넸고, 경찰차 안에 타고 있던 새로운 경찰 아저씨들은 바통을 이어받아 나를 태운 채 집결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번엔 내가 당황했는데 설마 경찰차가 택시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차를 타고.. 집결장소에 가다니! 하하...'
'Muchas Gracias' (정말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사명감을 얼굴 한가득 머금은 채 이번 워크캠프 담당자 타냐와의 통화 후, 얼마 안되 타냐의 집 앞에 나를 내려주었고 그제서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타냐는 나를 꼭 껴안으며 고생많았다고 토닥여주었고, 그렇게 나는 간신히 4일이나 지체된 워크캠프의 시작종을 울리게 되었다.
타냐의 집에 도착한 일요일 오전, 당혹스럽게도 그곳에 있던 봉사단원은 나 뿐이었다.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타냐와 번역기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워크캠프는 사실 수요일에 시작되었지만 피우라 근방에 있는 시골 마을 초등학교가 내일 개학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봉사는 내일부터 시작된단다.
또한 주말은 봉사일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와있던 세 명의 봉사단원은 근처 바닷가로 1박2일 여행을 떠나 오늘 밤 늦게나 돌아온다고 했다.
타냐는 만약 내가 내일까지 오지 않았었다면 이곳에 아무도 남지 않아 정말 워크캠프에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지어냈다.
단원들이 없는 한가로운 오후, 종일 뭐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곳엔 타냐의 8살짜리 아들 삐에가 있었다. 비슷한 정신연령대를 가진 우린 금새 친해졌고 나는 졸지에 삐에에게 벼락치기 스페인어 과외까지 받게 되었다.
이전 봉사단원들이 만들어 놓고 간 영어단어 카드를 이용해 열심히 동물 친구들의 스페인어 이름을 외우다 보니 금새 해질녘이 되었고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드디어 3주간 함께 할 그들이 왔다!!
이번 워크캠프의 리더인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독일에서 온 레나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클레어, 나를 포함하여 이번 워크캠프의 인원은 총 4명이었다. 너무 적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훗날 돌이켜보면 4명은 의견을 조율하기에도, 쉽게 뭉치기에도 좋은 최상의 구성이었던 것 같다.
다른 나라 친구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 반, 긴장 반 속에서 나는 조심스런 말투로 그들과의 첫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 나흘 간, 후끈한 열기가 감싸안은 피우라에서도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타냐네 집에 있었어서 그런가, 이미 지칠대로 지쳐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앞으로의 고생을 미리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열기가 한층 가라앉은 늦은 밤, 마지막 단원인 나를 포함한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더위를 먹을대로 먹은 클레어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파 누워있어야 했고, 레나는 설사병에 걸려 화장실에 계속 왔다갔다 했다.
하는 수 없이 나와 리더인 기예르모, 그리고 타냐 셋만이 앞으로의 수업 계획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타냐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결국 2개국어 모두 능통한 기예르모가 중재자가 되어 서로의 의견을 전달해주었다.
이번 워크캠프에서 스페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곧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문제없이 해냈다.
이전에 1년간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적이 있었다.
한국에 온 지 겨우 1달 된 7살짜리 꼬마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과 언어, 국적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었고 그 때의 경험은 사실 이번 캠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 또한 1년 간 아동복지소에서 유아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적이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봉사 경험이 이곳에서도 통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시도했었던 다양한 교육 방법들과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경험들을 전달했고 전반적으로 내 의견이 반영된 수업 커리큘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나는 비록 스페인어는 못했지만 실전에 필요한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단원이었던 것이다.
도움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그나마 이런 경험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택시기사 친구가 있다는 타냐 덕분에 별 무리 없이 Loma negra에 갈 줄 알았던 우리는 택시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어릴 적 가끔가다 보이던 '티코'가 노란색으로 색칠된 채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타냐와 타냐의 아들 삐에, 그리고 나를 포함한 봉사단원 네 명과 자기 몸뚱이만한 배낭들까지.
'도대체 어떻게 타라는 거야!'
앞좌석에 세 명이 앉고 뒷좌석에 네 명이 낑겨 앉은 채 배낭은 어찌어찌 쑤셔넣고..
그 작은 타이어 네 개는 기특하게도 별 탈 없이 일곱 명과 그들의 짐들을 실어 깊고 깊은 시골 마을 속으로 점점 들어갔고 종말엔 포장도로라고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후줄근한 학교 앞에 털썩 멈췄다.
Loma Negra는 우리나라의 시골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작은 마을이었다. 포장도로는 당연히 없었고, 온갖 가축들이 도로 위를 돌아다녔다.
주요 교통수단은 조랑말이 끄는 마차였고 가끔가다 '톡톡'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더웠다. 낮에는 수업은 커녕 그냥 가만히 앉아 숨쉬는 것 조차도 힘들 지경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내 준 간이 창고실에 짐을 풀었는데 이제 막 방학이 끝나서 그런지 청소가 되지 않아 온갖 벌레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고 밤이면 수십마리의 나방들 때문에 더우면 밖에 나갈지언정 창고 내에서 불을 킨 채로는 도저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자고 있던 매트 옆에 널부러져 있는 그들의 시체를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물도 툭하면 나오지 않아 제대로 된 샤워는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곳의 생활은 꽤 재미있었는데 '빨리 도시로 나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하루하루 흘러가는 게 안타까웠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는 그곳을 사랑했다.
우리는 오전에는 정규 수업에 들어가 선생님을 대신해 영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방과후 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지리, 미술, 컴퓨터 수업과 같은 다양한 교육들을 제공하였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수업은 컴퓨터 조작 법을 가르쳤던 수업이었는데 수업 도중 받은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 전 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던 컴퓨터 수업에는 개구장이 남학생들과 수줍은 여학생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중학생처럼 보일만한 큰 학생들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왔는데 전반적으로 남녀 아이들의 태도가 굉장히 상반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예르모가 앞에서 설명을 하면 남학생들은 서슴없이 곧잘 따라했다. 못하면 손을 번쩍 들고 도와달라고 재촉하며 문제를 척척 해결하려 하는 모습이 여느 초등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여학생들의 태도는 정말이지 큰 당혹감을 주었는데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뿐 마우스를 만지려는 의지조차도 없어보였다. 아니, 마우스를 만지는 것 자체부터를 두려워했다. 기예르모는 컴퓨터를 켜고, 시작버튼을 눌러 오피스 파일을 여는 방법 등과 같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소개했지만 여학생들은 보조로 나섰던 나와 다른 대원들이 수업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손에 마우스를 갖다대어 따라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저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계속 하였다. 아이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마우스 자체를 처음 만져보는 것 같아 보여 내가 처음 마우스를 만졌을 때를 떠올렸고, 곧 그들은 우리와 같이 마우스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것 자체부터를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기예르모의 수업과는 관계없이 그림판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하얀 그림판 위에 검은색 펜으로 마구 낙서를 했다. 아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에게 물감 툴을 알려주며 클릭을 해서 갖다 놓고 다시 클릭을 하면 검은 선들 사이가 알록달록 다양한 색으로 채워지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컴퓨터를 활용한 미술 수업이었다.
너무나 고맙게도 아이들이 마우스를 만져 컴퓨터라는 '물체'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부족해 두 세명이 컴퓨터 한대를 이용했는데 수업이 끝날 무렵즈음엔 곳곳에서 서로 마우스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모습들까지 볼 수 있었다. 화면 속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서투른 마우스질은 천천히 움직이며 점차 그 그림들을 완성해갔고 몇몇 여학생들 또한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은 왜이렇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일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의이고 여자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수줍어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까지 수줍어하는 아이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가르쳐줄 시간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여학생들의 이러한 태도는 정규 수업시간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학생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수업 태도 때문에 우리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되는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몇일 뒤, 나는 왜 여학생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수위아저씨와 마주쳤는데 하루는 아저씨께서 집에 우리를 초대해주신 것이다. 간단한 선물을 사들고 집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아저씨의 부인 역시 여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견지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거실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우리와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시는 반면 아내분은 주방에서 아예 나오지를 않으셨다. 얼굴을 보기 위해서 우리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고 그 이후에도 어두컴컴한 주방에 계실 뿐 마치 밖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셨다. 가정환경부터가 이러하니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줍음을 많이 타고 소극적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한번은 수업 도중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었다.
4-6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 반이 2개가 있었는데 처음에 들어간 반은 전체적으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서 들어간 옆반은 이전 반과 상당히 대조되었는데 이러한 아이들의 태도의 원인은 바로 선생님에게 있었다.
두번째 반의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의지가 강하신 분이셨다. 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며 툭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러한 선생님의 독점적이고 무성의한 행동으로 인해 아이들은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기도 제대로 못펴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지도 못하였고, 몇몇 아이들은 반항심으로 일부러 못된 행동을 하는 등 반 전체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겨우 한시간 들어와 이 아이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되.' 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먹힐리 없었다.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내 자신을 바라보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담임선생님을 바라보니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교사 또한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이곳의 환경을 바꾸려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것일까.
페루보다 더 발전된 우리나라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온 내가 배움을 나누기는 커녕 그 자리에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클레어는 이러한 내 생각과는 달리 그나마 선생님이 있기에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거라며 나와는 다른 견해를 보였으나 그 때 봉사의 의미에 대해 크게 회의를 느꼈던 것 같다.
결국 나 자신이 궁금해서, 나 자신이 만족하고 싶어서 이들에게 도움이 아닌 훼방만 놓고 가는 건가? 정말 도울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와서는 안되는 게 아니었을까?
몇 번의 봉사 경험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이제야 이런 의문이 들어버린 것일까. 그 때의 울음은 '봉사'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이외에 마을 축제 구경, 이장님과의 대화, 한 반에 최대 80명까지 차있던 열악한 교육 환경 등등 전하고 싶은 말도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도 너무 많았던 그곳 Loma Negra에서의 마지막 날, 페루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열린 학생들의 장기자랑 관람을 마지막으로 아쉽게도 짧고 강렬했던 5일간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막 학교에 처음 온 유치원생같은 초등학생 수업. 첫날이라 그런지 우는 아이들이 유독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수업도중 아이가 울면 엄마가 들어와 애를 달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Loma Negra에서 돌아온 다음 주 월요일, 하다못해 영어를 가르칠 학교까지 직접 알아봐야 했기에 우리는 타냐의 도움으로 근처 학교들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학을 한 지 이미 일주일이 지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이미 영어 선생님들을 구했거나 아니면 새학기라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학교들이 거절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둘씩 짝을 지어 타냐의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근방 학교, 심지어 유치원까지 순회했으나 모두 거절당하기를 이틀째.
다행히도 오후에 방문한 조금 먼 거리에 있던 두 개의 초등학교에서 허락을 해주었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가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여기서 두 개의 학교라는 것을 조금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설명하자면, 먼저 한 학교는 보통의 학교들처럼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해 점심을 먹기 전에 끝이 나는 그러한 보통 체제였다. 당황했던 게 다른 학교였는데 두번째 학교는 오후에 아이들이 등교해 해질녘에 하교하는 형태였다. 이유인 즉, 근처 학교가 보수공사에 들어가 아이들이 공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옆 학교를 빌린거란다. 학교에 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교장까지도 교장실을 빌려서 사용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보통 건물 하나짜리 자그마한 학교를 떠올리겠지만 학생 수만 해도 대강 천 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이곳은 우리와 같이 교육열이 심하지 않으니 학교를 빌려 사용하는 것에 대해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분위기는 확실히 도시로 나와서 그런가 Loma Negra와는 크게 상반되었는데 아이들이, 특히나 여자 아이들이 어찌나 당당하고 개구장이들인지 이곳이 같은 페루가 맞는건지 하는 의아함까지 들게 만들 정도였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을 예쁘다 하고 우러러 보는 것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내가 예쁘거나 이래서 그런 건 아니고 ^^; 바로 지구 반대편까지 스며든 한류열풍 때문이었다.
주말에 잠깐 친구들과 바닷가의 한 식당에 갔을 때도 식당 주인이 나와만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면서 호들갑을 떤 적이 있었고, 페루에 들어오고서부터 곳곳에서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하면 환대해 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수업 도중 한 초등학생의 필통에 드라마 '꽃보다 남자' 주인공 사진들이 입혀진 필통인 걸 보고나서야 '아, 정말 이곳이 한류 열풍이구나'를 실감했던 것 같다.
이러한 한류 드라마들의 인기는 곧 내 인기로 이어졌고 전형적인 '남미인'들 스럽게 활기찼던 이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수십명이 모여들어 나를 감싸안아 나중엔 기예르모가 수업종이 울린 후에 따로 움직이라 할 정도였다. 전에 아이들에게 같혀 기예르모가 나를 끌어냈는데 아이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해 뒤로 넘어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내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저 웃음만 날려줬을 뿐 대화는 절대 불가했는데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해 주었는지는… 한류열풍이 꾸준히 이어지길!^^
이렇게 재미나는 에피소드들이 있는 반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들 또한 있었는데 오전에 다니던 첫번째 학교에서 보았던 열악한 교육 환경이 그랬다.
우리는 단기간 봉사였기 때문에 늘 새로운 반에 들어가서 모든 아이들에게 일종의 '특별'수업을 해주었었는데 하루는 운동장 끄트머리에 있던 천막에서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많고 학급 수는 부족해 하는 수 없이 한 반이 책상과 의자를 운동장 끝 벽돌벽을 둘러싸 천막을 치고 칠판대신 벽돌벽에 종이를 붙여가며 수업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답게 시끌벅적 활기차 보여 후즐근한 주변 환경을 조금이나마 흐릿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이제 새학기인데 도대체 이 아이들은 언제까지 지붕없는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되는 것일까, 더군다나 이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적어도 교실 안에서 수업을 듣는데 아이들이 혹시나 이에 위축되지는 않을까 괜스레 걱정이 앞섰다.
오전에는 첫번째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점심에 약간의 휴식을 가진 뒤 오후에 다른 학교로 이동해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정신없이 지내고 나니 어느새 짧은 3주간의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봉사 마지막 날이었던 3월 19일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단원들은 몇 일 전부터 '엘씨, 뭐 갖고 싶어?' 하고 툭하면 물어봤고 끝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던 내게 그들은 내가 좋아하다 못해 거의 미쳐있었던 음식 3개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
바로 망고와 바나나를 얇게 썰어 튀긴 치플레, 그리고 페루의 대표적인 음식 세비체였다.
생일날 아침, 나와 타냐는 마지막 수업을 하지 않고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타냐가 내 생일선물로 세비체 요리법을 알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세비체는 페루의 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걸 여기처럼 초장이나 와사비에 찍어먹는 게 아닌 순수하게 레몬즙에 절여 약간의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
여기에 말린 옥수수와 고구마, 긴 나무뿌리처럼 생긴 우바를 사이드로 곁들이고 마지막으로 절인 회 위에 남미의 대표적인 향신료 고수잎을 살포시 올리면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세비체가 완성된다.
시장에서 다음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싼 값에 구매해 돌아온 후 우린 다른 봉사대원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참 간단해 보이는 음식이었는데 정식으로 만들려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려 결국 다 만들기도 전에 봉사대원들이 돌아왔다.
클레어는 망고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망고크럼블을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 나서 분주히 생일상을 차리기를 도왔다.
거의 '환장'하던 음식 세 개가 나란히 상에 오르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
다음날이 되서야 미역국의 존재가 떠올랐으니 나는 그때 이미 남미사람이 다 되지 않았었나 싶다.
달다구리한 향을 내는 망고크럼블 위에 초를 꽂고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니 먼 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곁에서 이렇게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뭉클했는지 모른다.
그 날 오후 마지막 수업시간, 반 아이들 모두가 우렁차게 불러준 스페인어 생일축하 노래는 마치 피날레와도 같이 지난 3주간의 워크캠프 활동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 일들을 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것들을 보았고 느꼈고 깨달았다.
문화의 차이는 큰 듯 하면서도 비슷했다. 결국 이 곳 역시 한국처럼 문제도 많지만 정 많은, 사람사는 내 나는 본질은 같은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미를 여행한다' 하면 '위험해!' 라는 반응을 가장 먼저 보이고는 한다.
어디가 더 위험하고 아닌가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건 스스로 내보이는 행동 하나 하나가 만드는 것이지, 장소 자체가 위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위험하다고 기피하고 그런 곳들에 가는 사람들을 마치 용감한 영웅처럼 취급하는 우리 문화는 바뀌어야 된다다.
사람사는 곳은 어느 곳이든 살만하다. 그들을 향해 내가 먼저 마음을 활짝 열고 올바르게 행동하면 즐겁고 행복하며 그곳이 또 하나의 마음 속 고향이 된다.
남미 워크캠프에 도전하고 싶지만 위험할까봐 포기했던 친구들이 있다면 미약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려 노력했던 이 세 개의 글들을 보고 꼭 한번쯤은 가보셨음 한다.
· 참가지역 : 페루 피우라
· 캠프Code 및 Title : PS17 / Making a Better School V Piura
· 활동테마: RENO/ SOCI
· 참가자구성(국적,인원): 4명 / 멕시코, 독일, 프랑스, 한국
#1. 도착 전부터 쌩고생, 집결장소 찾아 삼만리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머무는 동안 나는 세계일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일주를 한다면 하고싶었던 수많은 리스트들 중,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해외봉사.
이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몇몇 해외봉사 프로그램 중 가장 규모도 크고, 다양한 국가를 골라서 갈 수 있는 워크캠프는 당연히 대상 1순위였고 수많은 국가들 중 내 여행 시기와 맞물리는 곳을 고르다보니 지구 반대편의 땅, 남미의 페루가 그 대상이 되었다. 특히나,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이번 봉사는 안성맞춤 그 자체였다! 그렇다 할 영어 자격증 하나 갖추지는 못했지만 운좋게 워크캠프 단원으로 합격하게 되면서 이를 기점으로 내 남미에서의 여행 루트가 만들어졌다.
각종 봉사활동 수기에서도, 이전 여행자들이 쓴 여행서적에서도 종종 거론되던 워크캠프를 갈 수 있게 되다니! 한곳에 머무르면서 지역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여행 또한 꿈꿔왔기 때문에 여행의 시작 전부터 얼마나 워크캠프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해서부터 페루에서 개최되는 워크캠프 집결지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촉박하여 루트가 많이 빡셌기에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던 거진 한달여간의 행군의 쉼표를 찍은 날, 그 날의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전 국가 볼리비아에서 발생한 국민들의 거리시위로 인해 페루로 향하는 단 하나뿐인 길을 막아버려 길 위에서 이틀 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수도 라파즈를 제외하고는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아 미리 연락도 취하지 못한 채 워크캠프 시작 3일 전에서야 겨우 페루 담당자에게 몇일 늦는다는 일방적인 양해의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워크캠프 홈페이지가 잘 열리지 않아 남미에 도착한 이후 제공되어진 상세정보들을 읽지 못하였고, 워크캠프가 열린다는 페루 북부 도시 피우라에 도착한 아침까지 워크캠프가 피우라 내 정확히 어디에서 열리는지도 몰랐다.
그냥 떵 하니 의외로 컸던 도시 피우라에 내려진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강행군에 지쳐 어떻게 할 지를 버스터미널에 앉고 나서야 생각하고 있는 초연한 내게 페루의 교통수단, '톡톡'(바퀴가 세 개 달린 오토바이를 개조한 저렴한 택시)과 택시기사 아저씨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게 정말 끊임없이 조잘조잘 말을 걸어댔고, (아마 좋은 호텔에 데려다 주겠다는 등의 이야기였을 거다) 잠시 후 가장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가진 채 나를 바라보고 계시던 택시기사 아저씨께 조심스레 경찰서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경찰서' 한 마디로 해결했다.
나는 적어도 경찰관들은 영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름 큰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는 내벽의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있고 책상 3개를 갖다 놓은 허술한 모양새 그 자체였다.
이른 일요일 아침 웬 동양 여자애 하나가 지 몸뚱이만한 가방을 짊어메고 경찰서에 들어왔으니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었을까를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난다.
피우라라는 곳은 여행자들이 가지 않는, 즉 여행자들이라고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소도시였기 때문에 길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일 터, 만난 것도 신기하겠지만 제발로 경찰서까지 들어오는 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적어도 경찰서는..' 하며 들어갔던 그곳엔 안타깝게도 인터넷이 되지 않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이 또한 없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같지 않은 대화를 시도했고 곧 인터넷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 그들은 근처에 있는 PC방을 가르켰다.
솔직히 그들 말대로 PC방에 가면서도 상당히 불안했던 게 그동안 여러 PC방 심지어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도 워크캠프 홈페이지에서 제공해 준 '상세정보'를 열려고 시도했었으나 열리지 않아 그 주소를 미리 적어놓지 못했던 터였다.
근심 반 걱정 반을 품은 채 정보창을 열었고 놀랍게도 그 후미진 PC방의 인터넷 속도는 한국을 능가할 정도로 빠른데다 Window7이 깔려 있는 최신식이었고 정보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듯 '떡'하니 열렸다! 혼자 만세삼창을 외치며 주소를 받아 적은 후 경찰서로 돌아갔고 그들은 주소를 받아 들고는 '굿, 굿' 을 외치며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짐을 가지러 온 내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분명 그들은 내게 무슨무슨 말을 했겠으나, 이제 막 스페인어를 듣기 시작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내가 그 말을 알아들었을 리 만무했을 터, 하염없이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 아저씨들에게 피우라 내 여행지와 맛집 등 여러 정보들을 건네받고 궁금해하는 내 이야기를 손짓 발짓 써가며 전해드리기도 하며 우리는 금새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이곳에 봉사를 하러 왔다는 말에 즉, 좋은 일을 하러 왔다는 말에 큰 관심과 호감을 보내왔다.
그렇게 그들과 어우러져 여유로움을 느꼈던 순간도 잠시, 어서 나오라는 소리와 함께 경찰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들은 내 가방을 경찰차 안에 실어 넣으며 아쉬움의 인사를 건넸고, 경찰차 안에 타고 있던 새로운 경찰 아저씨들은 바통을 이어받아 나를 태운 채 집결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번엔 내가 당황했는데 설마 경찰차가 택시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차를 타고.. 집결장소에 가다니! 하하...'
'Muchas Gracias' (정말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사명감을 얼굴 한가득 머금은 채 이번 워크캠프 담당자 타냐와의 통화 후, 얼마 안되 타냐의 집 앞에 나를 내려주었고 그제서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타냐는 나를 꼭 껴안으며 고생많았다고 토닥여주었고, 그렇게 나는 간신히 4일이나 지체된 워크캠프의 시작종을 울리게 되었다.
타냐의 집에 도착한 일요일 오전, 당혹스럽게도 그곳에 있던 봉사단원은 나 뿐이었다.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타냐와 번역기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워크캠프는 사실 수요일에 시작되었지만 피우라 근방에 있는 시골 마을 초등학교가 내일 개학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봉사는 내일부터 시작된단다.
또한 주말은 봉사일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와있던 세 명의 봉사단원은 근처 바닷가로 1박2일 여행을 떠나 오늘 밤 늦게나 돌아온다고 했다.
타냐는 만약 내가 내일까지 오지 않았었다면 이곳에 아무도 남지 않아 정말 워크캠프에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지어냈다.
단원들이 없는 한가로운 오후, 종일 뭐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곳엔 타냐의 8살짜리 아들 삐에가 있었다. 비슷한 정신연령대를 가진 우린 금새 친해졌고 나는 졸지에 삐에에게 벼락치기 스페인어 과외까지 받게 되었다.
이전 봉사단원들이 만들어 놓고 간 영어단어 카드를 이용해 열심히 동물 친구들의 스페인어 이름을 외우다 보니 금새 해질녘이 되었고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드디어 3주간 함께 할 그들이 왔다!!
이번 워크캠프의 리더인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독일에서 온 레나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클레어, 나를 포함하여 이번 워크캠프의 인원은 총 4명이었다. 너무 적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훗날 돌이켜보면 4명은 의견을 조율하기에도, 쉽게 뭉치기에도 좋은 최상의 구성이었던 것 같다.
다른 나라 친구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 반, 긴장 반 속에서 나는 조심스런 말투로 그들과의 첫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 나흘 간, 후끈한 열기가 감싸안은 피우라에서도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타냐네 집에 있었어서 그런가, 이미 지칠대로 지쳐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앞으로의 고생을 미리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열기가 한층 가라앉은 늦은 밤, 마지막 단원인 나를 포함한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더위를 먹을대로 먹은 클레어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파 누워있어야 했고, 레나는 설사병에 걸려 화장실에 계속 왔다갔다 했다.
하는 수 없이 나와 리더인 기예르모, 그리고 타냐 셋만이 앞으로의 수업 계획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타냐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결국 2개국어 모두 능통한 기예르모가 중재자가 되어 서로의 의견을 전달해주었다.
이번 워크캠프에서 스페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곧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문제없이 해냈다.
이전에 1년간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적이 있었다.
한국에 온 지 겨우 1달 된 7살짜리 꼬마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과 언어, 국적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었고 그 때의 경험은 사실 이번 캠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 또한 1년 간 아동복지소에서 유아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적이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봉사 경험이 이곳에서도 통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시도했었던 다양한 교육 방법들과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경험들을 전달했고 전반적으로 내 의견이 반영된 수업 커리큘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나는 비록 스페인어는 못했지만 실전에 필요한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단원이었던 것이다.
도움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그나마 이런 경험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택시기사 친구가 있다는 타냐 덕분에 별 무리 없이 Loma negra에 갈 줄 알았던 우리는 택시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어릴 적 가끔가다 보이던 '티코'가 노란색으로 색칠된 채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타냐와 타냐의 아들 삐에, 그리고 나를 포함한 봉사단원 네 명과 자기 몸뚱이만한 배낭들까지.
'도대체 어떻게 타라는 거야!'
앞좌석에 세 명이 앉고 뒷좌석에 네 명이 낑겨 앉은 채 배낭은 어찌어찌 쑤셔넣고..
그 작은 타이어 네 개는 기특하게도 별 탈 없이 일곱 명과 그들의 짐들을 실어 깊고 깊은 시골 마을 속으로 점점 들어갔고 종말엔 포장도로라고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후줄근한 학교 앞에 털썩 멈췄다.
Loma Negra는 우리나라의 시골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작은 마을이었다. 포장도로는 당연히 없었고, 온갖 가축들이 도로 위를 돌아다녔다.
주요 교통수단은 조랑말이 끄는 마차였고 가끔가다 '톡톡'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더웠다. 낮에는 수업은 커녕 그냥 가만히 앉아 숨쉬는 것 조차도 힘들 지경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내 준 간이 창고실에 짐을 풀었는데 이제 막 방학이 끝나서 그런지 청소가 되지 않아 온갖 벌레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고 밤이면 수십마리의 나방들 때문에 더우면 밖에 나갈지언정 창고 내에서 불을 킨 채로는 도저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자고 있던 매트 옆에 널부러져 있는 그들의 시체를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물도 툭하면 나오지 않아 제대로 된 샤워는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곳의 생활은 꽤 재미있었는데 '빨리 도시로 나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하루하루 흘러가는 게 안타까웠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는 그곳을 사랑했다.
우리는 오전에는 정규 수업에 들어가 선생님을 대신해 영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방과후 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지리, 미술, 컴퓨터 수업과 같은 다양한 교육들을 제공하였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수업은 컴퓨터 조작 법을 가르쳤던 수업이었는데 수업 도중 받은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 전 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던 컴퓨터 수업에는 개구장이 남학생들과 수줍은 여학생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중학생처럼 보일만한 큰 학생들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왔는데 전반적으로 남녀 아이들의 태도가 굉장히 상반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예르모가 앞에서 설명을 하면 남학생들은 서슴없이 곧잘 따라했다. 못하면 손을 번쩍 들고 도와달라고 재촉하며 문제를 척척 해결하려 하는 모습이 여느 초등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여학생들의 태도는 정말이지 큰 당혹감을 주었는데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뿐 마우스를 만지려는 의지조차도 없어보였다. 아니, 마우스를 만지는 것 자체부터를 두려워했다. 기예르모는 컴퓨터를 켜고, 시작버튼을 눌러 오피스 파일을 여는 방법 등과 같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소개했지만 여학생들은 보조로 나섰던 나와 다른 대원들이 수업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손에 마우스를 갖다대어 따라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저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계속 하였다. 아이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마우스 자체를 처음 만져보는 것 같아 보여 내가 처음 마우스를 만졌을 때를 떠올렸고, 곧 그들은 우리와 같이 마우스를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것 자체부터를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기예르모의 수업과는 관계없이 그림판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하얀 그림판 위에 검은색 펜으로 마구 낙서를 했다. 아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에게 물감 툴을 알려주며 클릭을 해서 갖다 놓고 다시 클릭을 하면 검은 선들 사이가 알록달록 다양한 색으로 채워지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컴퓨터를 활용한 미술 수업이었다.
너무나 고맙게도 아이들이 마우스를 만져 컴퓨터라는 '물체'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부족해 두 세명이 컴퓨터 한대를 이용했는데 수업이 끝날 무렵즈음엔 곳곳에서 서로 마우스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모습들까지 볼 수 있었다. 화면 속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서투른 마우스질은 천천히 움직이며 점차 그 그림들을 완성해갔고 몇몇 여학생들 또한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은 왜이렇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일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의이고 여자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수줍어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까지 수줍어하는 아이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가르쳐줄 시간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여학생들의 이러한 태도는 정규 수업시간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학생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수업 태도 때문에 우리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되는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몇일 뒤, 나는 왜 여학생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수위아저씨와 마주쳤는데 하루는 아저씨께서 집에 우리를 초대해주신 것이다. 간단한 선물을 사들고 집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아저씨의 부인 역시 여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견지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거실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우리와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시는 반면 아내분은 주방에서 아예 나오지를 않으셨다. 얼굴을 보기 위해서 우리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고 그 이후에도 어두컴컴한 주방에 계실 뿐 마치 밖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셨다. 가정환경부터가 이러하니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줍음을 많이 타고 소극적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한번은 수업 도중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었다.
4-6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 반이 2개가 있었는데 처음에 들어간 반은 전체적으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서 들어간 옆반은 이전 반과 상당히 대조되었는데 이러한 아이들의 태도의 원인은 바로 선생님에게 있었다.
두번째 반의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의지가 강하신 분이셨다. 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며 툭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러한 선생님의 독점적이고 무성의한 행동으로 인해 아이들은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기도 제대로 못펴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지도 못하였고, 몇몇 아이들은 반항심으로 일부러 못된 행동을 하는 등 반 전체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겨우 한시간 들어와 이 아이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되.' 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먹힐리 없었다.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내 자신을 바라보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담임선생님을 바라보니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교사 또한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이곳의 환경을 바꾸려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것일까.
페루보다 더 발전된 우리나라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온 내가 배움을 나누기는 커녕 그 자리에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클레어는 이러한 내 생각과는 달리 그나마 선생님이 있기에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거라며 나와는 다른 견해를 보였으나 그 때 봉사의 의미에 대해 크게 회의를 느꼈던 것 같다.
결국 나 자신이 궁금해서, 나 자신이 만족하고 싶어서 이들에게 도움이 아닌 훼방만 놓고 가는 건가? 정말 도울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와서는 안되는 게 아니었을까?
몇 번의 봉사 경험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이제야 이런 의문이 들어버린 것일까. 그 때의 울음은 '봉사'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이외에 마을 축제 구경, 이장님과의 대화, 한 반에 최대 80명까지 차있던 열악한 교육 환경 등등 전하고 싶은 말도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도 너무 많았던 그곳 Loma Negra에서의 마지막 날, 페루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열린 학생들의 장기자랑 관람을 마지막으로 아쉽게도 짧고 강렬했던 5일간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막 학교에 처음 온 유치원생같은 초등학생 수업. 첫날이라 그런지 우는 아이들이 유독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수업도중 아이가 울면 엄마가 들어와 애를 달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Loma Negra에서 돌아온 다음 주 월요일, 하다못해 영어를 가르칠 학교까지 직접 알아봐야 했기에 우리는 타냐의 도움으로 근처 학교들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학을 한 지 이미 일주일이 지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이미 영어 선생님들을 구했거나 아니면 새학기라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학교들이 거절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둘씩 짝을 지어 타냐의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근방 학교, 심지어 유치원까지 순회했으나 모두 거절당하기를 이틀째.
다행히도 오후에 방문한 조금 먼 거리에 있던 두 개의 초등학교에서 허락을 해주었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가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여기서 두 개의 학교라는 것을 조금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설명하자면, 먼저 한 학교는 보통의 학교들처럼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해 점심을 먹기 전에 끝이 나는 그러한 보통 체제였다. 당황했던 게 다른 학교였는데 두번째 학교는 오후에 아이들이 등교해 해질녘에 하교하는 형태였다. 이유인 즉, 근처 학교가 보수공사에 들어가 아이들이 공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옆 학교를 빌린거란다. 학교에 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교장까지도 교장실을 빌려서 사용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보통 건물 하나짜리 자그마한 학교를 떠올리겠지만 학생 수만 해도 대강 천 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이곳은 우리와 같이 교육열이 심하지 않으니 학교를 빌려 사용하는 것에 대해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분위기는 확실히 도시로 나와서 그런가 Loma Negra와는 크게 상반되었는데 아이들이, 특히나 여자 아이들이 어찌나 당당하고 개구장이들인지 이곳이 같은 페루가 맞는건지 하는 의아함까지 들게 만들 정도였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을 예쁘다 하고 우러러 보는 것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내가 예쁘거나 이래서 그런 건 아니고 ^^; 바로 지구 반대편까지 스며든 한류열풍 때문이었다.
주말에 잠깐 친구들과 바닷가의 한 식당에 갔을 때도 식당 주인이 나와만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면서 호들갑을 떤 적이 있었고, 페루에 들어오고서부터 곳곳에서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하면 환대해 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수업 도중 한 초등학생의 필통에 드라마 '꽃보다 남자' 주인공 사진들이 입혀진 필통인 걸 보고나서야 '아, 정말 이곳이 한류 열풍이구나'를 실감했던 것 같다.
이러한 한류 드라마들의 인기는 곧 내 인기로 이어졌고 전형적인 '남미인'들 스럽게 활기찼던 이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수십명이 모여들어 나를 감싸안아 나중엔 기예르모가 수업종이 울린 후에 따로 움직이라 할 정도였다. 전에 아이들에게 같혀 기예르모가 나를 끌어냈는데 아이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해 뒤로 넘어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내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저 웃음만 날려줬을 뿐 대화는 절대 불가했는데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해 주었는지는… 한류열풍이 꾸준히 이어지길!^^
이렇게 재미나는 에피소드들이 있는 반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들 또한 있었는데 오전에 다니던 첫번째 학교에서 보았던 열악한 교육 환경이 그랬다.
우리는 단기간 봉사였기 때문에 늘 새로운 반에 들어가서 모든 아이들에게 일종의 '특별'수업을 해주었었는데 하루는 운동장 끄트머리에 있던 천막에서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많고 학급 수는 부족해 하는 수 없이 한 반이 책상과 의자를 운동장 끝 벽돌벽을 둘러싸 천막을 치고 칠판대신 벽돌벽에 종이를 붙여가며 수업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답게 시끌벅적 활기차 보여 후즐근한 주변 환경을 조금이나마 흐릿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이제 새학기인데 도대체 이 아이들은 언제까지 지붕없는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되는 것일까, 더군다나 이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적어도 교실 안에서 수업을 듣는데 아이들이 혹시나 이에 위축되지는 않을까 괜스레 걱정이 앞섰다.
오전에는 첫번째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점심에 약간의 휴식을 가진 뒤 오후에 다른 학교로 이동해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정신없이 지내고 나니 어느새 짧은 3주간의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봉사 마지막 날이었던 3월 19일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단원들은 몇 일 전부터 '엘씨, 뭐 갖고 싶어?' 하고 툭하면 물어봤고 끝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던 내게 그들은 내가 좋아하다 못해 거의 미쳐있었던 음식 3개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
바로 망고와 바나나를 얇게 썰어 튀긴 치플레, 그리고 페루의 대표적인 음식 세비체였다.
생일날 아침, 나와 타냐는 마지막 수업을 하지 않고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타냐가 내 생일선물로 세비체 요리법을 알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세비체는 페루의 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걸 여기처럼 초장이나 와사비에 찍어먹는 게 아닌 순수하게 레몬즙에 절여 약간의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
여기에 말린 옥수수와 고구마, 긴 나무뿌리처럼 생긴 우바를 사이드로 곁들이고 마지막으로 절인 회 위에 남미의 대표적인 향신료 고수잎을 살포시 올리면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세비체가 완성된다.
시장에서 다음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싼 값에 구매해 돌아온 후 우린 다른 봉사대원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참 간단해 보이는 음식이었는데 정식으로 만들려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려 결국 다 만들기도 전에 봉사대원들이 돌아왔다.
클레어는 망고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망고크럼블을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 나서 분주히 생일상을 차리기를 도왔다.
거의 '환장'하던 음식 세 개가 나란히 상에 오르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
다음날이 되서야 미역국의 존재가 떠올랐으니 나는 그때 이미 남미사람이 다 되지 않았었나 싶다.
달다구리한 향을 내는 망고크럼블 위에 초를 꽂고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니 먼 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곁에서 이렇게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뭉클했는지 모른다.
그 날 오후 마지막 수업시간, 반 아이들 모두가 우렁차게 불러준 스페인어 생일축하 노래는 마치 피날레와도 같이 지난 3주간의 워크캠프 활동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 일들을 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것들을 보았고 느꼈고 깨달았다.
문화의 차이는 큰 듯 하면서도 비슷했다. 결국 이 곳 역시 한국처럼 문제도 많지만 정 많은, 사람사는 내 나는 본질은 같은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미를 여행한다' 하면 '위험해!' 라는 반응을 가장 먼저 보이고는 한다.
어디가 더 위험하고 아닌가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건 스스로 내보이는 행동 하나 하나가 만드는 것이지, 장소 자체가 위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위험하다고 기피하고 그런 곳들에 가는 사람들을 마치 용감한 영웅처럼 취급하는 우리 문화는 바뀌어야 된다다.
사람사는 곳은 어느 곳이든 살만하다. 그들을 향해 내가 먼저 마음을 활짝 열고 올바르게 행동하면 즐겁고 행복하며 그곳이 또 하나의 마음 속 고향이 된다.
남미 워크캠프에 도전하고 싶지만 위험할까봐 포기했던 친구들이 있다면 미약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려 노력했던 이 세 개의 글들을 보고 꼭 한번쯤은 가보셨음 한다.